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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위안: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복음 - 목회와 신학 2014년 1월호

by 설렘심목 2014. 1. 6.

유일한 위안: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복음

- 목회와 신학 2014 1월호

들어가기 전에:

역사적 배경 2013년도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지 450년이 되는 해였다.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요리문답의 교회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역사에 대한 연구는 성경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성경주의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11명의 사도들에게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그 방법까지도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그 중의 하나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교회가 분별력을 갖고 스스로 발견해야 할 과업이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채택한 방식은 간단한 세례문답이었다.

집례자는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한 다음 수세자가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 집례자는 수세자에게 세례를 행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신은 천지의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까?” “, 믿습니다(Credo).” 교회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신앙을 보이는 외적의 고백을 통해 확인한 후 세례를 행하고 주님의 제자를 삼았다.

요리문답의 기원이 세례에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요리문답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교회는 주님께서 성경에서 분부한 모든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가르쳐야 할 내용을 두 가지 형식으로 총괄적으로 요약, 제시했는데 하나는 신앙고백서(confession)이고 다른 하나는 요리문답서(catechism).

성경은 오늘날과 달리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대중들이 소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방대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는 초신자들의 신앙교육에 큰 효과가 있었다.

문답식 교육은 가장 오래된 보편적인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대화》도 문답 형식으로 된 교육서이고 논어(論語)도 상당수가 문답 형식으로 기술돼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문답식 교육 방법을 자주 사용하셨다. 대표적인 것이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오늘날 여러 가지 교육 방식이 있겠지만 문답식 교육이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된 신앙 교육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요리문답은 세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간단한 신앙 항목인사도신경에 관한 것이 주 내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조금씩 보충돼주기도문십계명그리고성례에 관한 항목들도 첨가됐다.

종교개혁 전까지 기본적인 이 4가지 항목이 요리문답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고 중세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종교개혁 직전에는 요리문답의 사용도 매우 형식적으로 이뤄져 제대로 된 신앙 교육이 교회 안에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러나 거짓된 로마 교회를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시킨 종교개혁가들은 요리문답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에 가담한 상당수의 교회 혹은 목사들은 저마다 수많은 요리문답을 작성해 성도들에게 참된 교리를 교육했다.

이 요리문답들은 기존의 4가지 항목을 큰 틀로 유지하면서 꼭 가르쳐야 할 중요한 교리적 항목들을 대폭 보강했다. 그래서 요리문답의 분량이 이전에 비해 많아졌다. 종교개혁가들이 논쟁적인 신학 서적이나 논문들만 출판했다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대중들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종교개혁의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롯됐다. 하이델베르크는 그 당시 독일 지역의 영방(領邦)인 팔츠의 수도였다. 이곳을 다스리는 프리드리히는 황제 선출권한을 가진 선제후로 아주 경건한 인물이었다. 팔츠 지역은 독일 남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루터파와 개혁파(칼뱅파)가 동시에 경쟁하는 지역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나라를 종교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우르시누스라는 탁월한 신학자와 그의 동료들에게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출판된 다른 요리문답과 마찬가지로 새로 작성된 요리문답도 원래 팔츠 지역의 교회들만을 위해서 작성됐다. 그러나 그 내용과 형식과 문체의 탁월성으로 인해 팔츠 지역을 넘어 전 유럽으로 전파됐다. 그 결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오늘날 개혁파 교회들의 공식 요리문답이 되었고 영미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과 더불어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에서 요리문답의 양대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유일한 위안:

이 주제의 중요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1문을 살펴보자. 이 문답이야말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핵심을 보여 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요리문답의 답은 다음과 같다. 1 문답에서 요리문답 전체의 핵심 주제가 위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2문답은 유일하고 참된 위안 속에서 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이다.

죄와 비참, 구원, 그리고 감사 이 세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된다. 죄와 비참에 대한 이해 없이 구원을 알 수 없고,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감사의 삶이 따라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비참, 구원, 감사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독일에서 작성됐기 때문에 독일어로 작성됐다. ‘위안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Trost’인데 한글로는 대부분위로라고 번역됐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위안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편안함을 뜻하는데불안혹은두려움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으로위로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위로는 기본적으로 고생하거나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격려를 위한 내용으로 한다면, ‘위안은 생사의 기로에 있는 것과 같은 극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위안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을 시편 23편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독일어 ‘Trost’에서 영어의 ‘trust(신뢰)’라는 단어가 파생됐는데, 위안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서 비롯된 흔들림 없는 평안이라고 할 수 있다.

450년 전에 작성된 요리문답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첫 질문에 대한 답을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신자라면 누구나 절실하게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평안 없이 살아가고 있다. 특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하루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불안의 연속이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언제 운영하는 사업이 망할지 모르고, 언제 병들어 죽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참되고 유일한 위안:

소속감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찾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큰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2:16-20)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농사를 열심히 지은 결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큰 수확을 얻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 부자가 심중에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어떻게 보면 부자는 아무 걱정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그 부자에게,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1문답 핵심을 찌른다. 그것은살아서도 죽어서도 위안이 되는 것에 대한 물음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사는 동안에 많은 재물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았다. 적어도 여러 해 동안은 먹고 사는 것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은 죽고 나서의 위안이다. 많은 재물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위안이 될 수 있지만 죽고 나서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위안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도 변함없이 위안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부자는 죽음 이후의 위안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이것은 그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1문답은몸과 영혼을 언급한다. 참된 위안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위안이 돼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를 위한 위안이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몸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영혼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그리고 몸과 영혼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몸의 행복이 영혼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자기 영혼에게 자기가 쌓아둔 것으로 얼마든지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2:15)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유일한 위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소속감으로 답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위안이 되고 몸도 영혼에도 위안이 되는 것은 참된 소속감이다. 이것 역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과 본질상 동일하다. “네가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요리문답은나는 몸도 영혼도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요리문답의 대답이 과연 위안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을 향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해볼 물음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은나는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관계적 질문이다. 자아에 대한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관계의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라는 인격적 실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드러나거나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소속에 의해 결정된다. 소속감이 결여됐거나 잘못된 공동체에 소속돼 있으면 그것은 불안과 비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몸과 영혼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에 의해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참된 위안으로 인도하는 질문이다. 참된 위안에 대한 요리문답의 대답은 한편으로는 부정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다. 1문의 부정적인 대답에 따르면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대답이야말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를 나누는 기준이다. 무신론자는 인생의 주인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유신론자들은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신에게 의탁한다.

1문답의 긍정적인 대답에 따르면나의 몸과 영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참된 위안에 대한 부정적 답변이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를 구분한다면, 긍정적 답변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는 우리의 소속이 어떻게 바뀌게 됐는지를 분명하고 진실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안뿐 아니라 위안의 반대되는 개념인 불안이나 비참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비참은 요리문답에서 위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비참은 위안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의 비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위안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비참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단어로서 요리문답에 사용된 이 단어는 독일어로 ‘Elend’라고 한다. 이 말은땅에서 추방된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를 연상케 하는 단어다. 이 비참은 가나안 땅에서 추방돼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비참은 궁극적으로 죄로 인한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이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비참이다. 추방된 자들, 포로들, 노예들, 나그네들(외국인들)에게는 위안이 없다. 그들의 삶은 항상 불안하다. 그들의 삶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어떤 세력의 손아귀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늪에 빠진 상태와 같아서 그들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큰 비참함에 빠진다. 즉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전혀 없다. 결국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우리 안에 혹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비참에서 건지신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삼위 하나님: 위안의 이유 요리문답 제1문답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 점에서 소속감과 관련해 앞서 언급한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세례를 시행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요리문답은 삼위 하나님을 바로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서 가시적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세례는 소속이 바뀜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세상과 마귀의 종이었으나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바뀌었음을 증거하는 예식이 바로 세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례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것이 제1문답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위안과 관련해 제1문답은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제시한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을 잘 가르쳐서 바른 신앙고백으로 인도해 궁극적으로 세례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삼위일체론적 특징은 요리문답 곳곳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답은 실제로 이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교육의 분명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교리문답이라고 하면 교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리문답이 가르쳐야 할 내용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교사는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누구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리 교육이 실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교리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가르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1문답에 따르면 삼위 하나님은 고린도후서 1:3에 나타나 있듯이 모든 위안의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마귀에서 해방시켰고, 모든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을 확신시키셔서 성화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1문의 대답은 죄와 구원과 감사로 이뤄진 요리문답 3중 구조와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위안이 되시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항상 잘 되게 하시기 때문인가?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제하시기 때문인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걱정과 근심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죄가 없는 삶이 아니라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삶이 우리의 위안이 돼야 한다.

결론

450년 전 독일에서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안 속에 살고 있다. 경제적인 생활수준은 높아졌지만 자살률과 이혼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위안을 찾고 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예전보다 위안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모든 위안들은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다. 이와 같은 불안의 상황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위안을 찾는 자들에게 여전히 큰 호소력을 지닌다.

불안의 큰 요인 중 하나는 소속감의 결여다. 컴퓨터와 모바일의 발달로 개인주의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IT 발달로 새로운 소속감이 생긴다고 해도 그 소속감은 상당히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소속감의 결여는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현대인들에게 소속감이 얼마나 중요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소속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위안이라고 선포한다.

참된 소속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당신의 소속은 어디인가?”라는 요리문답의 질문과예수만이 우리의 위안이라는 답변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여전히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위안이야말로 절망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복음이다.

마지막으로, 요리문답은 특별히 한국 교회의 설교자에게 도전을 준다.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누구를 설교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과연 한국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설교하고 있는가? 한국 교회의 설교가 인본주의로 바뀌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교리를 외면함으로써 설교자의 관심 내용이 성경의 교리를 대체하면서 설교의 주제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설교의 주제가 삼위 하나님이 아니다 보니 성도들은 설교를 들어도 세상에서 능력 없는 삶을 살거나 위안을 찾지 못하고 불안과 근심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