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무덤 융릉과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역사가 얼마나 아무렇게나 왜곡되어 있는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엉뚱한 해석은 지식장사꾼들의 횡포가 어디에까지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들 엉터리 학자와 지식장사꾼들 덕에 전국민은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었다고 믿는 말도 안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실록과 한중록, 여타 관련자료들을 읽어보면 전국민의 상식이 된 이런 논리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것인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쟁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조의 잘못은 사도세자를 너무 늦게 죽인 일이다.
정조의 잘못은 개인적 효심으로 역사를 조작한 일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고 이틀 뒤 실록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上命擧前後被殺宦寺恤典 - 영조38년 윤5월 23일
(왕이 전후로 피살된 환관들에게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보통 이 환관들은 모두 사도세자가 때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인 사람들로 추측한다. 정말 사도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일까? 의심하는 사람도 많지만 다른 실록 기록에도 사도세자의 살인이 등장한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날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汝搏殺王孫之母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손자의 어미, 즉 경빈박씨, 은전군의 생모이자 자신의 자식을 낳은 처를 때려 죽였다. 사도세자가 죽은 그해 정월의 일이다. 자식인 은전군조차 이날 칼을 맞고 연못에 버려졌는데 연잎에 얹혀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은전군의 또다른 이름이 하엽생이라고 한다.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은 이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한중록이다.
"당번내관 김한채라 하는 것을 먼저 상하오셔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사람의 머리 버힌 것을 보앗으니... "
사도세자는 사이코패스였던 것이다. 내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서 들고는 궁중의 내인들에게 두루 보여주고 있으며 혜경궁홍씨도 그 잘린 머리를 본 것이다. 사도세자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친어머니인 선희궁 영빈이씨의 내인을 죽인다.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이 물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죽였다. 맹인에게 점치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인다.
"의관이며 연관(가마꾼)이며 액속(궁궐수행원)이며 죽은 거들도 있고 병신된 것도 이셔 하루에도 대궐서 사람을 여럿을 저내니..." - 한중록
도대체 죽인 사람의 총숫자가 얼마나 될까? 하루에도 여러 사람을 져서 대궐밖으로 날랐다고 한다. 실록과 한중록만 살펴봐도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의 숫자는 수십명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사도세자가 때려 죽였거나 칼로 죽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평양으로 몰래 갔다온 이후 수행하던 한 사람이 죽었다. 세자궁 중관 유인식이다. 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린다. 영조는 그가 세자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조가 왜 사람을 죽이는지 물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야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암이 나아로라." - 한중록
그러자 영조는 정신나간 소리를 한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그냥 신경질나서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다. 당장 세자를 법에의해 처분해야 할 국왕이 이런 말을한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조선왕조 내내 세자가 사람을 때려 죽인 사례가 어디에 있겠는가? 연산군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혼군인 연산군 조차 직접 사람을 쳐서 죽인 경우는 없다. 성종의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 두사람을 손수 마구치고 짓밟았다. 그러나 죽이는 것은 사람을 시켰지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전쟁이나 반정이 아닌 평시에 직접 사람을 때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인 왕이나 세자로는 사도세자가 조선 역사상 거의 유일하다.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겠다는 시파의 박하원이 천유록을 지어 정조에게 바친 일이 있다. 정조는 이 책을 읽고 책제목을 대천록으로 고쳐주었다. 이 속에는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100여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이 사도세자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적었겠는가? 그랬다면 정조에게 살아남지 못했을텐데... 사도세자의 연쇄살인은 아들 정조도 모두 인정한 참혹한 역사적 사실이다.
"世子장(죽일장)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 대천록 상편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
하루 세번 왕과 왕비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아도 난리가 나며, 세자시강원의 강의를 빼먹어도 신하들의 엄한 지적과 비난을 감내해야 하지 않는가? 일부 엉터리들은 이런 기록을 깡그리 무시하고 한중록이 노론을 옹호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했다고 버젓이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록도 조작되었는가? 승정원일기, 대천록, 임오일기, 이재난고, 현고기, 정조의 홍재전서도 조작되었는가?
사실 저 정도의 살인은 왕이 저질렀다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이 저러니 어찌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신하들이 먼저 나서서 세자를 탄핵했어야 하는 일인데 기이하게도 노론조차 세자를 감싸고 돌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000년대가 되자 갑자기 그 노론이 당쟁의 수단으로 세자를 죽였다는 희안한 논리가 마구잡이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너무나 단순한 일이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 분풀이로 사람을 죽이고, 부왕을 살해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건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핵심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보통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핵심역할을 하였다고 주장들 한다. 그렇지 않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은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映嬪)이씨다.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업사오니 소인이 참아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대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이 하옵는 일이 올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 - 한중록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대처분 하라고 말한다. 즉 죽이라는 말이다. 사도세자의 친모가 울면서 영조에게 자식을 죽이자고 말한다. 그날 당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안에 넣게 된다. 이 사실은 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뒤주에 들어가던 그날의 일이다.
殿下以深宮一女子之言, 動搖國本乎?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을 듣고 국본을 흔들려 하십니까?)
도승지 이이장의 말이다. 영조는 이 말에 격분해 도승지를 처단하려까지 한다.
여기서 일부 역사왜곡자들에게 묻는다.
사도세자의 친어머니가 노론이었나? 노론이어서 친자식을 죽이라고 한 것인가? 영조도 노론인가? 노론이어서 자식을 죽였나? 왜 사건의 본질을 다 덮고 노론소론 논쟁으로 호도하려 하는가? 명약관화한 일을 자잘한 방증으로 뒤집어 엎고는 사실을 왜곡해버리는 것이 과연 역사가의 할 일인가? 이들의 역사왜곡 시도는 정말 사도세자의 죽음보다 더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왕의 자식이든 세자든 사람을 죽이고 변란을 획책하는데야 장사가 있겠는가? 이런 정황임에도 극악한 대신들이 세자를 변호하고 나선 일이다. 누구도 세자를 격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형편이고 영조는 연로해 조만간 죽을것이 예상되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노론이 문제가 아니라 세자를 끼고 돈 신하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영조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부당 자당으로 나누어진 상황이다. 세자를 해치기 위해 노론이 상황을 조작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사도세자는 영조36년 8월부터 그 이듬해인 영조37년 4월까지 단 한번도 영조를 만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절대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일이다. 자식이 아버지와 한 궁궐에 있으면서 10개월이나 인사한번 하지 않았다는 일은 매우 엄청난 사건이다. 어느 세자가 부왕에게 하루 세번 인사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이 사건을 지식장사꾼들은 진현이란 말로 교묘히 바꾸어 말한다. 대례복을 갖춰입고 인사하는 것을 말한다. 영조가 진현하지 말도록 했다는 실록구절을 갖다대며 영조가 만남을 거부했다고 말한다.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가 부왕에게 아침인사 한번 하지 않고 10개월을 버티고 있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지 진현이란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최소 10여명 최다 100여명 이상의 사람을 죽이고 무기를 감추어 두고 있으면서 영조로부터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먼저 선수를 치고자 했다. 즉 부왕을 살해할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행위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죽기 전날의 일이다.
"웃대궐을 수구로 가오신다 하야 가시다가 못 가오식고 도로 오시니 그것은 윤오월 12일간이라." - 한중록
사도세자는 왜 영조가 머문 궁궐로 가는데 수구 즉 하수도 구멍으로 가려 했을까? 실제로 사도세자는 머물고 있던 창덕궁을 수구문을 통해 나서 영조가 머물던 경희궁으로 가다가 돌아온다. 왜 칠흑같은 어둠에 비를 맞으며 경희궁으로 가려했던 것일까?
"병화로 아모리 하려노라"
"협검하고 가 아모리하고 오고 싶다." - 한중록
영조를 살해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대궐에 떠돌고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영조에게 달려가 대처분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영빈이씨는 세자가 수차 자신을 살해하려 한 일이 있었다고 영조에게 고변한다. 칼을 잘 쓰던 사도세자에게 자신의 시녀를 잃기도 한 선희궁 영빈이씨는 부왕살해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 전에 한 말이
'變在呼吸之間'
(변란이 호흡의 사이에 있다) - 영조실록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칼을 뽑고 대궐 담쪽을 향하게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사도세자는 근친상간의 혐의까지 지고 있다. 영조가 가장 총애했던 화완옹주가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어 궁으로 돌아온후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위협한다.
"쵸뉵일 그 옹쥬를 불너다가 안검하고 하오시기를 '이후에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 칼로 너를 베리라' 하니 선희궁(사도세자의 친모)께오서도 그 옹주를 혹 엇디할까 돌아오셔서 그 광경을 대하오시니 심사 엇디하리오."
사도세자의 성적 취향은 매우 심각했다. 궁녀들을 때려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에서 그 궁녀와 관계를 맺었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당하는 경빈 박씨를 데려왔다는 이야기에 연이어 다른 내인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가까이 했다는 것은 성관계를 말한다.
"그 사이 내인들 갓가이하오시니 그 내인들이 슌죵티 아니하면 치오셔 혈육이 님니(줄줄 흐르는 모양)한 후라도 각가이 하오시니 뉘 됴화하리오"
영조와 선희궁 사이의 옹주인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다. 그런데 그는 수시로 화완옹주를 불러다가 통명전 등에서 잔치한다. 혜경궁홍씨는 한중록에서 화완 옹주를 정씨의 처라는 뜻으로 정처라고 부른다. 극도로 화완옹주를 싫어하고 있다.
"잔치 처소는 후원 아니면 통명전이오 머무시는 데는 환취정에서도 하오시더니라."
"상하가 다 지쳐 자 상위에 음식은 만반하고 그 경색이 다 귀신의 일이니 하늘이 시킨 밖에 할 일이 없더라."
"경모궁(사도세자)께서 정처(화완옹주)에게 '잘 안해준다'하고 편지를 써 보내신 것 가운데 망극망극 차마 거들지 못할 말이 많고."
그래서 영조가 그토록 집요하게 뒤주속에 세자를 넣고 구멍을 뚫어서 관찰하고 손을 만져 차가워 진것까지 확인했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 화완옹주 사건이 있다고 믿는 학자들이 다수 있는 것이다. 왜 친어머니가 그토록 모질게 사도세자를 죽이자고 했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덮고 효자 정조의 말만 믿고 모든 잘못은 노론 홍인한 등이 지어낸 것이라 주장해서야 되겠는가? 심지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자체가 날조라고 주장하기 까지 한다. 혜경궁이 정조가 살아 있는데도 없는 사실을 지어 한중록을 만들었을까? 당시 목격자들이 무수한데 사도세자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고 적었단 말인가?
혜경궁 홍씨는 단지 하나, 대명률에 미쳐서 저지른 일은 감형한다는 구절을 믿고 사도세자가 제정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병으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변호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병은 정조조차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이상한 학자들은 사도세자의 병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마치 사도세자가 개혁 왕세자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왕세자의 개혁을 방해하던 노론이 교묘히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주장이다. 완전 소설일 뿐이다.
영정조를 조선의 부흥기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조선에서 백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궁중에서 공공연히 벌어져도 누구하나 제지하지 않고 이를 덮으려 한 것이다.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군주는 축출해도 되는 것이 유교의 주장이다. 영정조시대, 인권이 바닥에 떨어지고 부자가 서로 죽여야 할 정도로 엉망인 시대였던 것이다. 정조, 이를 끝까지 바로잡지 않고 간다. 정조가 성군인가? 정조는 기껏해야 효자일 뿐, 성군이 되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정조이후 조선의 마지막 암흑기가 오는 것이다. 정조는 작은 효심으로 나라일을 그르치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인적인 보복을 한 문제를 안고 있다. 민본주의는 어디에도 없다. 저런 짓에 몰두하며 외부의 변화에 눈감고 있다가 결국 조선은 망하게 된다. (출처 : http://blog.naver.com/sohoja/50152687852) 소호자 글.
영조시대 당쟁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영조의 모후가 되는 인원왕후도 후에 노론으로 전향했고 영조의 정궁인 정성왕후 또한 노론 쪽 집안 사람입니다.
영조의 아끼던 화평, 화협, 화완 옹주가 모두 노론쪽으로 시집을 갔고 사도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도 노론에서 시집을 왔으며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 조차 노론 쪽 집안에서 시집을 왔습니다 .
영조의 늦게 둔 자식으로서 위에 있던 형도 죽고 없어 유일하게 대통을 이을 자였던 사도세자는 태어나자 마자 세자로 책봉되어
부모 곁에서 떨어져 외딴 전각에서 혼자 자라며 부모의 정도 소원해 졌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노론 쪽이나 사도세자의 교육은 소론의 영수이자 당대 뛰어난 학자인 이종성, 우리에게 암행어사로 더욱 유명한 박문수 등이 맡았고 그로 인해 노론, 소론 같은 당파에 국한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 성장 중에는 당파적인 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세자의 여러 시각을 가진사람들을 두루 만남으로 진보적 시각 또한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세자는 당시 주류였던(부모나 집안의 주류인)노론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노론에게는 점점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곧 겉으로는 탕평책을 시사하고 있었으나 적자의 태생이 아니고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던 자신을 보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노론과 영조가 자신의 즉위에 반대했던 소론을 숙청한 신임사화를 반대하는 자식을 보고 있기는 걸끄러웠을 것입니다 .
이로서 노론과 척을 지게된 사도세자는 누이 , 하물며 생모까지 두 사람의 불화를 부채질했으며 자신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집안 또한 이를 방관하였으며 영조의 계비, 후궁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세자를 못살게 굴기에 바빴습니다.
특히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화완옹주는 이렇듯 노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 영조의 사랑을 바탕으로 더 큰 권력을 휘두룰 수 있었음으로 감싸주는 이 하나 없던 세자가 여러 핍박 속에 훗날 뒤주에 갇혀 죽게 되고 그의 아들인 세손인 산, 훗날 정조가 연산군처럼 되지 말란법은 없었음으로 핍박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저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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