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안은 ‘제자삼기 조직신학’의 강의안이다.
본 강의안을 기준으로 삼아 교회 실정에 맞도록 보안을 하면 보다 훌륭한 강의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1. 강의의 목적
본 교재의 목적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영성을 키워주며 ⇨ (1) 사랑하는 형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성경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 (2) 타종교인들을 전도할 때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전도하게 된다. (3) 더 나아가 이제껏 이단들의 도전을 피하던 것에서 돌이켜 오히려 이단을 설득시켜 그들까지 전도하게 된다.
(흔히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이단들이 오면 현관문도 열어주지 말라”고 가르쳐 소극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이단들이 오면 그들에게 문을 개방하고 성경을 가르치라. 그리고 교회로 인도하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단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성도들 현관을 두드리는데 우리들은 그들보다 뚜렷한 무기, 조직신학을 가지고도 무서워 현관문도 열지 못하고 있다면 이율배반적일 것이다 )
2. 강의의 구성
본 교제의 구성 원리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따라 정하였다.
그러나 조직신학의 서론 부분은 생략하였다. 그러나 1-10과를 공부하다보면 서론에서 배울 부분까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3. 강의의 내용
(1) 일단 평신도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내용면에 있어서도 어려운 교리문제는 많이 다루지 않고 대신 그들의 피부에 부딪히는 삶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전도에 필요한 교리문제는 ‘조직신학적 차원’에서 심도있게 다루었다.
(2) 주제에 해당하는 요절을 암송하기 쉽도록 번호순으로 정리하였다. 하루 1요절, 1주일에 6개의 요절을 암송한다면 10주 강의를 통하여 ‘조직신학 황금 60요절’을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황금 60요절이면 전도폭발에 많은 도움을 주며 특별히 이단과의 대결에서도 말씀의 무기가 될 것이다.
•본 강의는 모두 10회에 걸쳐 공부하게 되는데 이것을 마치면 수료식을 성대히 개최하여 뜨거운 소속감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나면 그들이 배운 지식과 용기를 가지고 어느 기관에서든지 뜨겁게 봉사하며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교재 '제자삼기 조직신학‘을 마치고 난 후, 다음 단계로 바울성경연구원에서 발행한 ‘R.P.R.성경기억법’으로 공부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바울성경 |
바울성경연구원 |
문의 사항은 언제나! ☎ (042) 489-2122 / H.P 018-401-1691
원장 박 웅 식 목사
1. 신 론
(찬송가 40장을 부르면서 시작)
(이 강의는 첫 강의이니 만큼 모인 사람들과 속히 공감대 형성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 공부시간을 소홀히 다룬 만큼 두 번째 모임에는 회원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많은 준비와 기도로 무장하자)
• 이끄는 말
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모시고 앞으로 10주간 성경공부를 같이 연구하게 될 ‘홍길동목사’(전도사)입니다.
이렇게 같이 공부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성경 공부시간을 통하여 보다 가까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을 체험하시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한번 기도하고 공부시작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시간 저희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기회가 우리에게 인생의 그 어느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황금과 같은 시간임을 믿습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실의에 빠진 자들이 용기를 얻게 하시고 절망 가운데 있던 형제, 자매들이 소망을 가지게 하시고, 지금 현재 이미 기쁨과 소망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더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기도는 극히 짧게)
□ 본 강의 시작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 분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매주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 분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께 예배드리고 그 분을 위해 봉사를 드리는가? 여러분,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십시다.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 이제, 주제 1, 신론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그림을 보니까 지구가 지금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지구입니다.
성경책을 펼쳐주시고 창세기 1:1-2을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면서 큰 마음을 먹고 성경을 펼쳐서 읽으려는데 바로 이 말씀이 나온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저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새빨간 거짓말이다”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말도 않되는 소리지. 어째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냐? 세상은 원래부터 있던 것인데......” 저는 한참 동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분명히 이 세계 보다는 더 위대하고 크신 분이실테니 이 세계를 못만들것도 없지. 이 정도도 못만들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마음이 차츰차츰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문제 가지고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뭐냐? 하늘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 아니냐? 우주 보다 천만배, 만만배 더 크시고 그것을 초월하신 분이신데 이까짓 쬐그만 천지 하나 못만드시겠냐? 지구하나 못만드시겠냐? 아주 간단히 믿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어지니까 나머지는 저절로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들게서도 믿습니까? (아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그렇게 힘이 될 수 없습니다. “햐,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자나 깨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구나!” 얼마나 기쁘고 힘이 되는지 그렇게 힘이 생길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성경을 쭉 읽어나가면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때 무슨 연장도구를 가지고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지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무엇으로 지었을까요?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14, 20절에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지를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천지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으셨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과학자들은 말하길 저절로 ‘빅뱅’했다 그럽니다. 그러나 그건 상상이요 추측일 뿐입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를 대지못하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어떤 물질이 저절로 “뻥”하고터져서 생겼다’이게 빅벵인데, 누가 그 사실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빅벵’은 믿어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것은 않믿으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그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었다는 증거를 대라’ 그럼 우리는 그러지요. ‘그렇다면 빅벵한 것을 증거를 대라’
증거를 대지 못하는것은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빅벵을 믿고 우리는 창조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으로 빅벵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천지창조’ 증명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창조설을 증명합니다.(아멘)
여기서 우리는 천지창조가 어떤 순서를 따라 창조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천지창조의 순서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천 지 창 조 의 순서 | |
1째날 : 빛 |
처음 4일 = 배경 |
2째날 : 궁창 | |
3째날 : 바다와 육지, 과목 | |
4째날 : 해, 달, 별 | |
5째날 : 새와 물고기 |
후 2일 = 활동할 배역들, 마지막 순서에는 최종 주역(主役)인 사람 |
6째날 : 짐승, 사람 | |
7째날 : 안식 |
이상에서 본 것 처럼 사람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4일 동안은 배경을, 나중 2일은 배경 안에서 활동 할 배역들을 만드셨는데, 특히 사람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 졌습니다.
질문 유도 |
그렇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천지를 만든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큰 배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의 기간
자 그런데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질문 |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소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4, 10, 12, 18, 20 25, 31절) ......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보기 싫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산과 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조용히 흐르는 냇물과 강줄기, 아름다운 강산, 각종 짐승, 더 나아가 우리 인간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으셨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세상은 좋았더라! 이렇게 느껴 지십니까? 아니면 세상이 짜증나고 모든 만물이 ‘여러분이 보시기에 싫었더라’ 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세상을 바라볼때에 “내 눈에는 보시기에 싫었더라”라는 심정이 있다면 하나님의 눈을 빌려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눈에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보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강사가 처음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받은 은혜를 들려주면 좋다.... 아래는 저자의 간증)
제가 처음 결혼하였을때 저는 밤에는 신학공부하고 낮에는 리어커를 끌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지요. 아침 일찍 청량리 시장에 나가 생선을 떼다가 리어카에 실고서 면목동까지 가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물건을 실고 면목동으르 가려고 전농동 언덕배기를 넘어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전농동 언덕배기는 도로 양쪽 주위에 비를 피할 때도 없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쏱아지는겁니다. 때는 6-7월달인데 날씨가 제법 덮지요 비는 쏱아지지요. 그러니 생선은 리어카에서 푹푹 썩어지지요. 이거 아무리 세상을 바라보아도 그렇게 실망이 될 수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리어커를 끌고 피할 수 없는 소낙비를 맞으면서 생선 썪는 냄새를 맡으면서 기도하길
“하나님, 저에게 환난을 주시는것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거 너무 심하신거 아닙니까? 시험을 주실때는 피할 길을 마련하여 주신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소낙비가 이렇게 쏱아지는데 어디로 피합니까? 하나님 한번 저하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디로 피합니까? 그리고 비를 주시더라도 이 언덕배기라도 내려가거들랑 주시지 이거 뭡니까 얼음채운 생선짝 위에다가 소방수 호수처럼 ..... 생선 이거 본전이 얼마나 들어간줄 아십니까?”
말이 기도지 기도아닌 불평과 푸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 억수같은 소낙비를 맞으면서 번떡 생각이 들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창자국을 맞으면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생각이 탁 나면서 갑자기 눈물이 쏱아지는데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빗물과 함께 범벅이 되어 내 두 뺨에 흐리기 시작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내가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것만도 얼마나감사한데, 이렇게 비를 맞고 오늘은 본전도 못건지더라도 내가 칼치나 꽁치나 고등어로 태어난 것 보다는 백번 감사할 일이지. 생각하니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그때 부터 소낙비야 퍼부어라. 생선아 썩을 바엔 아주 흔적도 없이 팍팍 썩어라. 까짓 나에게 목숨 주시고 또 내 죄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감사합니다. 순간적이나마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때부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옷은 더럽혀졌지요. 멀리서 보면 시궁창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지요. 그런데 그 생쥐가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인간의 행복은 물질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였다는 것을 저는 그제서야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멘)
저는 그 때부터 이 찬송가 40장 찬송가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같이 불러불까요?
(다같이 부른다. 그리고 본문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너무너무 좋았더라.
소낙비가 쏱아지고 시궁창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더라도 좋았더라. 세상에서 실패하였더라도, 시험에 낙방하였더라도, 직장에서 쫓겨났더라도 좋았더라. 세상이 너무너무 좋았더라.
여러분 가운데 세상을 향해 부정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 그 사람에게서 부정적인 눈을 싹 뽑아가시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새 눈으로 교체하여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눈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모두 바꾸어 진줄 믿습니다. (아멘)
그 다음에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2. 식언치 않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①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②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씁니다.
•‘식언치 않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약속하시고 이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언약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신다’ 는 말 ‘한번 한다고 했으면 꼭 이룬다’는 뜻이지요..
•‘후회가 없으시도다 ......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빈틈이 없고 실패가 없고 후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아유, 목사님, 하나님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타락하니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하였고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잖아요”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하고 싶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을 한번 찾아봅시다. 창 6:5-6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5-6)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 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 15:11)
여기 보면 분명히 한탄과 후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셨다고 하셨을까요? 한탄하시거나 후회하시거나 비슷한 말인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찌 후회할 수가 있을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하여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 분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왜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고 하였을까요? 왜?
(질문 유도..모두 꿀먹은 벙어리)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경에는 두 가지 언어가 았다.
궁극적인 언어가 있고 순간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엄마가 어린아이에게 ‘얘, 삼엘아, 우리 아이 이름이 삼엘인데(모두 웃음, 모두가 다 아는 교회의 어린이의 이름을 말하면 공감이 간다) ’오늘 엄마랑 엑스포 놀러가자’ ‘야, 신난다’ 그래서 엑스포로 갑니다. 그런데 엑스포에 갔어. 엄마가 ‘너 멀리 가지마. 길 잃어버리니까,’ 그런데 이 삼엘이를 잃어버렸네. 엄마가 울고불며 몇 시간만에 겨우 찾았습니다.
엄마가 화가났습니다. “너 왜 그렇게 말 않듣니. 멀리가지 말라고 했잖아! 너 다시는 이런데 데려오는가 봐라”
자, 이 모자의 말 가운데 궁극적인 언어가 있고 순간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 엑스포 놀러가자”한 것은 궁극적인 언어이고 “너 다시는 이런데 데려오는가 봐라” 한 것은 순간적인 언어입니다. ‘너 다시는 이런데 데려오는가 봐라’ 했지만 며칠 후면 또 어머니는 삼엘이를 데리고 엑스포공원에 또 가는거지요. 이런걸 무슨 언어라고요? (반드시 대답을 받아낸다: “순간적인 언어”)
성경을 읽다보면 이 두 가지의 말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신가? 변덕이 많으신가? 오해할 수 있는데 그렇죠?
하나님이 애굽에서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한 가나안으로 너희를 인도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때부터 맥을 이어온 궁극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송아지를 섬기고 죄를 지었을 때 ‘난 너희와 함께 가지 않으리라 너희들 끼리 가라’ 그러자 백성들이 울면서 ‘잘못했나이다 용서하소서. 다시는 이러지 않겠나이다’ 회개하니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라”(출 33장)하였는데 여기서 ‘나는 가지 않으리라’ 한 것은 순간적인 언어입니다..
갈 것 다 가시면서 백성을 채찍질 하기 위하여 ‘나는 안가겠다 너희들 끼리 가라’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언어입니다. 사람들을 교육시키시려고 하시는 순전히 인간들이 사용하는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원래가 하나님은 말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뭐 말이 필요한게 있습니까? 천지를 지우신 능력많으신 분이 .... 그러나 인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간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인간들의 언어 습관을 그대로 사용하시는 거지요.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에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3.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제가 처음에 교회에 나갔더니만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오메가는 알겠는데, 오메가 시계가 유명하니까, 그런데 “알파”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알파는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처음 글자가 알파요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인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계 이름을 왜 오메가라고 한 지 아십니까?
시계의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오메가!” 시계의 마지막이라는 것이지요.더 좋은 시계는 더 이상 없다 거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의 처음은 언제 입니까? 천지창조입니다. 시간의 마지막은 언제 입니까? 종말입니다. 우리는 종말때 까지, 끝까지 살면 졸업합니다. 그런데 졸업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졸업은 상급 학교의 ‘입학’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더 한 차원 높은 입학을 하기 위하여 졸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졸업은 한 차원 높은 영생입학을 위한 졸업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반드시 종착역이 있습니다. 졸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졸업 후에는 다시 영생으로 이어진다는것입니다. 영생입학을 위한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졸업은 다음 영생을 위한 졸업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아멘)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종말은 영생입학을 위한 졸업이다”(따라함)
“세상의 종말은?” (영생 입학을 위한 졸업이다)
우리는 이 영생이라고 하는 입학을 위하여 세상에서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인생 졸업때는 시험문제가 없는데 영생입학시험 문제는 있습니다. 딱 한문제만 나온다는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딱 한문제,
문제 : ‘예수는 누구신가?’
정답 :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 이상 끝,
우리는 이 문제처럼 쉬운 문제가 없는데 않믿는 저 밖의 사람들 한테는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몰라. 가서 이 문제 내봐. 못알아 맞힙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요......
(저, 목사님, 그런데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는 것 까지는 고마운데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꼭데기에 올라가서 내 죄를 용서하여 주셨나요?) 여러분 그 질문하고 싶으시죠? 그건 제 4과에서 말씀드립니다. 그거 오늘 설명하면 나머지 공부못하니까. 4과 공부할 때는 모두 손수건 하나씩 가지고 나오세요. 모두 눈물바다 콧물바다 될테니까! (다음과에서 계속 기대감을 가지도록 한다)
4. 스스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스스로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 봅시다.
어떤 어린이가 교회에 나오면 이런 질문을 잘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저는 이 어린이의 이 질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가 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게 된 동기를 분석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만든 분이 있다. 나는 엄마가 만들었고 엄마는 외할머니가 만들었고 외할머니는 증조 외할머니가 만들었고 마지막 고고고고고조 할머니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렇게 논리를 가지고 질문하는 것이거든요. 참 기특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고서 ‘응, 하나님은 누가 만든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이야. 혼자 원래부터 계신 분이지’ 그러면 이 아이는 눈을 깜박깜박거리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짖지요. 꼭 하나님도 그 누군가 만드신 분이 있을 것 같은데....하는 표정이예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말은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모세가 애굽에서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바로왕에게 붙잡히면 죽을까봐 미디안땅으로 도망합니다. 거기서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루는 양을 치는데 호렙산에서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습니다. 올라가보니 하나님이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모세야. 너,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 나 못합니다. 말도 어눌하고 하니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내가 말 잘하는 네 형을 네 대신 말하게 하겠다. 그리고 능력의 지팡이도 주겠다’
해서 겨우 겨우 겨우... 모세는 마음에도 없이 억지로 승낙을 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내가 하나님이 보내서 너희를 인도하러 왔다’고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어냐’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리이까?”
모세의 질문을 받은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어 왔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이말의 뜻을 알기 위하여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는데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I am who I will be."
이 말은 “장래에 너희에게 나타날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에게 설명해 주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자면 너에게 서서히 나타나 너를 축복의 세계, 가나안, 천국으로 인도할 하나님이다. 그 말입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이야기를 해 주어도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앞으로 너에게 어떻게 나타나 너를 인도하게 될 지 알게 될것이다.“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표현에 대하여 살펴볼까요?
(아래 이름 밑줄 친 4가지는 성경에 한글 발음대로 표기된 것임)
(구약에 나타난 이름)
1. 여호와 닛시(출 17:15)......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으로 모세가 아말렉과 싸워 이긴 기념으로 세운 단에 붙인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의 편에 선자는 항상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여호와 샬롬(삿 6:24)......‘여호와는 평강의 뜻’이란 말로 기드온이 오브라에 세운 제단에 붙인 이름으로서 평화의 왕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항상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여호와 삼마(겔 48:35)......‘여호와께서 거기 게신다’는 뜻으로서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하늘의 예루살렘에 붙인 명칭이다. 장차 성도가 동참할 메시야 왕국의 회복과 그 영광의 찬란함을 보여준다.
4. 여호와 이레(창 22:14)......‘여호와께서 준비하시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준비하신 장소에 대하여 붙인 이름으이다.
여호와 로이(시 23:1)....‘여호와는 나의 목자’란 뜻으로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한 보호와 이로 인한 절대적 안전을 보여준다..
여호와 라파(출 15:26)...‘여호와는 치료 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는 위험에 노출 되지 않으며 영육간의 질병 가운데서도 보호받음을 보여준다.
여호와 엘 게물로트...‘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강한 세력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무력함을 보여 준다.
(신약에 나타난 이름)
데오스(θέο)...하나님, 퀴리오스(κύριο)...주(主), 주님, 주인, 파테르(πατήρ)... 아버지
우리는 이 이름 이외에도 하나님의 명칭을 만들 수 있다.
만들어 봄시다.
(돌아가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 가운데 체험한 하나님을 말하게 유도한다.)
예 : (1)박집사 : 화재났을때 극적으로 구해주신 하나님
(2)김집사 :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
(3)그 밖에 : ( )
5. 공의(公義)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 9:8)
(4번과 연결해서) 하나님 이름 가운에 두 가지를 더 들자면 여기 5번에서 처럼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6번 주제처럼 ‘사랑의 하나님’을 들 수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 이 두가지 문제는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먼저 ‘공의’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공의가 무엇입니까?
공의는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공의는 자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않됩니다.
‘왕은 공의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임금이 공의롭지 못하면 법과 질서가 무너져 버립니다. 하나님도 공의로와야 합니다. 한번 한다고 했으면 해야 하는거지요.
‘아담아,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죽으리라’ 했으면 정녕 죽는겁니다. 이 것이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용서해 주자니 ‘공의’가 손상을 입고 공의에 따라 심판을 하자니 ‘사랑’이 손상을 입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아십니까?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법령을 발포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그 두 눈을 뽑도록 하라’그랬는데 그 법을 제일 처음 어긴 사람이 바로 자기 아들 왕자였습니다. 이거 어쩐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왕자니까 특별히 용서하여 주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왕이 한 말이 곧 법인데 용서해 주면 결국 자기가 법을 않지키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거 어쩌나?’ 임금은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왕자의 한쪽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대신 눈 한쪽을 뽑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임금님의 ‘사랑과 공의’에 감동하여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합니다. 모든 백성은 공의롭고 사랑많은 임금을 모시게 된 것에 기뻐하며 그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배웁니다. 마땅히 죽도록 에덴을 쫓아 냅니다. 지옥으로 보냅니다.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백성들은 살려주시기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살려주시기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며 사랑’입니다.
공의는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는 보수적 공의(remunerative justice)와 불손종하는 자에게 벌을 주는 응보적 공의(retributive justice)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수적 공의는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천국이 주어집니다. 응보적 공의는 무엇일까요? 잘못한 사람에게 주는 응보, 형벌을 말합나다. 지옥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응보적 공의는 받으시지 마시고 보수적 공의만 받으시길 바랍니다.
6.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의 가진 속성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이 바로 ‘사랑’이라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다시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사랑은 어떻게 표출될까요?
사랑은 용서와 이해와 남을 위해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교양도 별로 없이보이는 고기잡이 어부들과 삼년을 같이 사시고 마침내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않될 줄 압니다.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심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전 13:13)
이 말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중에 사랑이 첫 번째이고 나머지는 둘째요 셋째이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기초를 세우고서야 나머지 믿음이 생길 수 있고 소망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모든 것의 기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속성 6가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6가지의 속성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공의롭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6가지의 속성을 공부하였습니다. 한번 복습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속성이 있다고 했습니까?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1번 ...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2번 ....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3번 ...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4번 ... (스스로 계신 하나님) 5번 ...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6번 ... (사랑의 하나님)
잘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배운 요절을 다음 주까지 암송하여 오도록 하십시다. 1일 1요절씩 암송하면 6일(주일은 교회 봉사로 쉬도록 한다)이면 모두 암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의문나는 점 있으시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 없으면 다음 인간론을 조금 소개해주면서 다음 시간을 기다려지도록 하라.)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나’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
을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만드셨을까? 그리고 현재의 내 주소는 무엇일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정말 하나님의 백성인가? 나는 구원받았는가? 아니 정말 구원이 있는가? 아니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 내 마음에 천국이 없는데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니 내가 꼭 천국에 가야하나? 아니천국은 있기는 곡 있나? 혹시 거짓말은 아닐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듣고 또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요절 암송 방법 ① 새벽기도때에 요절을 암송하면서, 요절 말씀을 생갹하면서 기도하도록 한다. 요절 말씀을 암송, 및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훌륭한 ‘큐티'(Q.T)가 될 것이다. ② 집에서 가사일을 하면서 암송한다. 식사기도 때마다 암송한다. 잠자리에 들어서 다른 생각말고 암송한다. ③ 시험을 본다든지 하면 성도들에게 부담이 크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본인이 암송, 본인이 체크하도록 유도한다.(테스트 할때는 부드럽게) |
# 창조론에 대한 기사 소개 #
미 주류 진화론 허구 증명 .... 과학 교육 방향 변화일 듯 | |||
미 학교 총기 난사 등 계기 ...‘폐기론’ 다시 공론화 보수주의 기독교등 창조론 교육 주장에 힘실려 | |||
미국 캔자스주 교육위원회가 지난주 주내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도록 판결, 그동안 과학교육에서 정설로 되다시피한 진화론이 허구임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미국내 다른 주의 과학교육은 물론 세계각국의 진화론 교육이 큰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미국 캔자스주의 진화론 폐기 결정은 지난 6월에 있은 컬럼바인 고교 총격 사건과 연이어 있었던 학내난사사건이 결정적 작용을 한것으로 분석된다. 총기난사로 숨진 학생들 장례에 참석한 빌리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크린 그레임 목사는 설교에서 “학교가 신앙교육을 금했고 그 결과 가장 안전해야할 학교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다”고 전하며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였다. 그후 미 하원에서는 다수득표로 학교에서 십계명을 가르치자는 결론을 냈고, 미국 각 학교 교실에는 십계명을 적은 액자가 걸리게 되었으며 진화론 폐기까지의 결과를 끌어내게 되었다. 그동안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계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증명하며 공교육에서 진화론의 폐기를 수 없이 주장해 왔다. 진화론으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인명경시풍조에 휩싸여 점점 잔인해지고 동물적인 행동으로 포악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수지식인층들은 우려를 나타내왔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테네시 켄터키 루이지애나주도 진화론을 폐기하거나 창조론을 같이 가르치도록 하는 방향으로 결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 80년대초, 부터 창조과학운동을 펴고 있는 창조과학회는 캔자스주의 이번 결정을 환영하면서 국내에서의 활동에 큰 힘을 얻을 것으로 전망한다. 창조과학회는 진화론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따라서 학교교육에서 진화론을 믿는 교육을 반대해 왔다. 지난 94년 창조과학회에서는 교육부의 과학교과 개편과정에서 창조론을 삽입토록 주장하며 교육부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 텔레비젼에서 진화론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진화론의 폐기는 지난 95년 미국의 저명한 진화론자인 미카엘 텐튼 교수의 ‘진화론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미국내에서 사실상 진화론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창조과학회 이웅상 부회장은 “그동안 우리 교육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진화론이 과학적 검증을 거친 것처럼 학생들에게 소개되고 교육돼 왔다”면서 “학생들에게 교육되는 진화론 역시 고전이어서 현재의 진화론을 설명하려면 창조론이 언급되는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또 “이번 미국의 결정으로 인해 반드시 한국에서도 진화론 폐지의 바람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러한 움직임과 발맞춰 지난 9-11일 한동대에서는 창조과학 전국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번 연합회의 창립으로 전국 과학교사 회원들은 앞으로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소개하고 교과서를 분석해 창조론에 입각한 새로운 교과서를 편찬, 여러 매체를 통해 창조론을 소개하는 일을 해나갈 방침이다 | ||
“화석도 인간 진화 증명하기엔 역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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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말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 원시생물부터 진화하여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창세기에 드러난 말씀대로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창조된 것일까. 그동안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단순한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하며 창조론을 부인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 목적을 위해 인류가 오스트랄로피쿠수에서 호모에렉투스를 거쳐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으로 진화된 것으로 그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 다. 한국창조과학회 부회장 이웅상교수(명지대 생물학과)는 진화론자들이 인류진화의 계열이 제시하고 있는 화석들을 분석,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조목조목 따져 제시 |
하였다. 이 교수에 따르면 오스트랄로피쿠스는 1924년 처음 발견, 두개골과 몇가지 특징이 사람과 비슷하다고 발표된 것과는 달리 단순히 원숭이의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오스트랄로피쿠스가 유인원으로 인류의 혈통에 속해 있었다는 주장은 치아를 갖추고 직립보행을 했을 것이라는 선입견때문이라고 밝혔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모든 화석들은 원숭이의 변종, 아니면 특이한 증상을 갖고 있는 현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종에서 종으로 진화되는 중간단계의 화석은 한번도 별견된 일이 없어 진화는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상 국민일보 1999년 8월 18일자, 24면 |
2. 인간론
•이끄는 말
강의에 들어가면서 다음 찬양을 부르도록 한다(강의 내용과 연관있음)
우리 찬양합시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아”(2번 연속)
•이끄는 말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땠습니까? 신론을 공부하시면서 좀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제목부터가 딱딱하지요? 신론 ...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신가?” 그렇게 되지요? 그리고 지난 시간에 요절 6개씩 모두 암송해 오시라고 하였는데 암송해 보셨습니까?
(부드럽게 테스트 하라)
•오늘은 “인간론”인데 이 말도 좀 딱딱하지요? 그러나 이것도 조금 바꾸어 생각하시면 부드럽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래도 좀 딱딱한 것같죠?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바꾸면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내 피부에 와서 닿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27)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같이 한번 따라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저는 성경에 나온 말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단어 딱 하나를 고르라 하면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를 고릅니다. 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키 워드(key word) 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제가 이쁜 데라고는 없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미남이 아니라고 하는 데는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이 누구이신 줄 아십니까? 바로 저의 아내입니다.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어찌나 제가 못생겼던지 실망이 되더랍니다. 그럼 왜 나하고 결혼하였느냐 물으면 “당신의 모습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지 끌리는 데가 있어서 결혼하였다”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끌린거야” 그래서 같이 웃었지요.
저는 거울을 볼 때는 부끄럽습니다. 챙피하니까. 그러나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제가 자랑스러울 수 없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되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저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보입니까? (웃음)
저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형상이 보입니다. 여러분 바로 앞의 자매님들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얼굴에서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다시 웃음)
저는 청년들과 함께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가장 좋아합니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아”
너의 영혼,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얼마나 아름다운지. 여기 영혼이라는 말은 다른말로 바꾸면 형상일수도 있는데 너의 형상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렇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려왔을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감히 바라보기에 경외스러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출 34:29)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각자의 얼굴을 한번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이 보일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내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고 보시면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림의 아담의 모습을 보십시오. 웃고 있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이제껏 막연한 상상의 단계를 넘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말은 imago-dei(라틴어)라고 하는데 여기 imago변하여 image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image of god 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마음, 도덕적 존재. 거룩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은혜 넘치는 마음, 공의로운 마음, 감사가 얼굴에 넘치는 마음, 고마와할 줄 아는 마음, 오리를 가고자 할때 십리를 가줄줄 아는 마음,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우리 한번 같이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옆사람에게도 말해줍시다. ”자매님은 또는 형제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해선 안될 줄 압니다. 예를 들면 다같이 따라 합시다. 대신 이 시간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줄 알고 따라하는 겁니다. 마지막입니다. 다같이, 시작 ”빌어먹을 놈“ ”꼴보기 싫은 놈“ ”개같은 놈“ ”염병할 놈“ ”급살맞을 놈“ ”미친놈“ ”우라질 놈“ ”육실할 놈“ ”꼬끄라 죽을 놈“ ”지에비도 없는 놈“ 다같이 큰 소리로 ”이 말을 지금부터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이 말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모두 웃는다) 다시는 이런 말은 내 입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
“①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②영화와 ③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①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 했습니다.
여기 이 말 뜻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여기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 했는데 천사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 말은 엘로힘(םיהל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단수로 보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복수로 보면 ’천사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말도 되고 ’천사‘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 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문법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인데 성경의 전체 흐름에 비추어 볼 때는 어떨까?
벵겔의 주장 | |
사람 |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다. |
사람은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 |
천사 |
구원얻을 후사(사람)를 위하여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히 1:14) 이다. |
결론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긴 하지만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천사가 사람을 위하여 섬기는 준재이다. 이다. |
사람은 ‘영화와 관을 씌운 존재’이다. 여기 영화와 존귀는
•②영화(榮華)...glory, .... 번영하고 꽃필 존재
•③존귀(尊貴).....honor....영예로운 존재
우리 인간은, 저와 여러분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우주에서 하나님 보다는 못하지만 하나님 다음으로 최고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 )의 영장이라? 만물의 영장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가 지금은 혹 부유치 못할 수도 있고 복음을 위하여 바울처럼 감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감옥안에 갇혀서도 그랬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 → 이래뵈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이다.
우리 한번 한 목소리로 따라합시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
여러분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어린아이들이 있으면 색종이로 아름다운 모자를 하나 만들어서 자녀에게 씌워 주십시오. 모자에 “영화와 존귀” 탁 써가지고 ... “엄마, 이거 뭐야?” “응, 이 모자를 쓰면 앞으로 커서 영화와 존귀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리고 기회 있을때 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우리 준호가, 우리 주희가 우리 정호가, 우리 호준이가, 우리 삼엘이가 모두 영화와 존귀를 받아 귀하게 자라나게 하나님 항상 지켜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더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화와 존귀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3.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
(םדא, =사람, 아담은 ‘흙’=המדא, 아다마, 와 같은 어근이다)
“하나님이 ①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②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③생령이 된지라”(창 2;7)
여기 보니까 사람이 흙과 생기와 생령으로 지음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흙과 생기와 생령”은 무엇일까요?
• ①‘흙’(המדאה־ןמרפא, 아파르 민 하아다마, =땅으로부터 취해진 티끌, dust from ground)...... ‘땅으로부터의 티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םדא, 아담)이라는 말과 ‘아담’ 이라는 말과 ‘땅’(המדא, 아다마)이라는 말이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흙이란 말이 아담이란 말이고 아담이란 말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아담이라고도 하는데 이 인간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겁니다.
“아유, 목사님, 무슨 흙으로 지어져요? 뼈와 살로 지어졌지” 그러고 싶지요?
여러분, 뼈와 살이 흙입니다. 뼈와 살이 영원히 뼈와 살입니까? 뼈와 살이 70-80년만되면 모두 흙으로 싹 변해갑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거지요.
사람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힘이 듭니다.
운동 선수가 발꿈치를 들고 뛰어보세요. 굉장히 힘들지요. 발바닥을 땅에 대고 걸으면 조금 편하고 땅에 앉으면 더 편하고 누으면 더 편한 것은 우리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 죽으면 어디로 간다? 태어난 고향 흙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 ②‘생기’(םייח חמשׁג, 니쉐마트 하이임, breath of life) ......즉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다른 동물에게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직접 “생명의 호흡”을 사람의 코를 통하여 불어주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여러분 인공호흡 있지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졌는데 숨이 탁 멈췄습니다. 이때 얼른 입에다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 벌떡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까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입을 대고 키스하듯이, 인공하흡 하듯이 그렇게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던 우리는 모르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다! 그렇게만 믿으시면 됩니다.
•③‘생령’(הית שׁפג, 네페쉬 하야, a living person)...... 이 말은 ‘살아 호흡하는 생명체’라는 말로서 우리 성경에는 여기에 딱 한번 나옵니다. 원어상에는 다른 동물에게도 이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쓰여진 ‘네페쉬 하야’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인격적 상호 교감을 통해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과는 확실히 다른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생령’인 ‘네페쉬 하야,는 영혼이 아니다. 단지 ’생명의 호흡‘이다. 동물들에게도 이 단어가 씌였지만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래서 이 말은 그냥 ’생명의 호흡‘일 뿐이다. )
※ ‘형상, םלצ, 첼렘,과 ‘모양, תומד, 데무트( image and likeness)......형상과 모양(image and likeness)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을 말하지만 상호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말로서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단어 |
뜻 |
무생물 |
짐승 |
사람 |
말씀 흙 |
•말씀= 로고스 •흙=땅으로 부터의 티끌 |
•말씀으로 지음 |
•말씀으로 생물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짐승이 되도록 말씀하셨다(창 3:19) |
•하나님이 흙을 가지시고 사람을 하나하나 빚으셨다. |
생기 breath of life |
•생명의 호흡 |
× |
•생기(생명의 호흡)를 짐승에 주었다
|
•생기(생명의 호흡)를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생기를 주셨다. |
생령 a living person |
•살아 호흡하는 생명체 |
× |
•생령(살아 호흡하는 생명체)이 되었다 |
•생령(살아 호흡하는 생명체)이 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 |
× |
×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영혼이 포함된다 | |
이름지은 분 |
•짐승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다(창 2:19-20) |
•아담의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었다. 왜냐하면 아담이라는 말이 흙이라는 말이니까 |
(사람은 이상 도표에서 본 것 처럼 지어졌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
사람응 제외한 모든 다른 생명은 그냥 말씀으로 명하시어 동물을 지으시고 생명체가 되게 하였으나 인간의 경우만 그 육적 생명을 직접 손으로 빚으셨고 또 직접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서 영혼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합니다. 만일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을 소유하였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이 당신안에서 숨쉬고 있다는증거이다.
4. 하나님으로부터 돕는 베필을 지음받은 존재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①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①돕는 배필,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1)하나님의 형상으로, (2)존귀와 관을 씌우게 하시고, (3)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주어 생령이 되게 하시어 그야말로 100만불짜리 1,000만불짜리 고귀한 존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나서 아담에게 많은 짐승을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배필이 있었으나 아담에게는 배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시고 그를 돕는 배필을 지으시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루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아담을 도울 수 있는 배필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하와’입니다. 아담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하와’(הוח)라는 뜻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니까 아담이 혼자 있어서는 사람이긴 하였지만 생명은 아니었는데 ‘하와’ 즉 ‘생명’이 주어져서 두 사람은 완전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기 남자와 여자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
남자가 제 아무리 잘났다 할지라도 혼자 있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남자가 제 아무리 힘이세고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여자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이 그렇게 맞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같이 살다가 여자가 먼저 죽었다, 그러면 남자는 맥을 못쓰더라고요. 꽤제제하고 영 지실이 들어가지고 온 몸에 이만 득실득실하고 얼마 못살고 곧 죽어요. 왜? 생명이 없으니까. 그런데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자가 먼저죽고 여자 혼자 남아봐. 생둥생둥하게 얼마나 잘 사는지 몰라요. 왜 그렇지요? 여자는 ‘생명’이니까. 그래서 홀애비는 이가 서말, 과부는 쌀이 서말이라지요. 여자, 즉 생명(여자)은 끊질진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여자가 더 오래 살아요? 아니면 남자가 더 오래 살아요?(대답:여자가요)..
왜 그렇습니까? 여자는 생명이니까. 그래서 여자를 갈대에 비유하잖아요? 잡초근성이 여자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않죽어. 갈대밭에 불을 놓으면 그 다음해에 다시 올라와. 남자는 소나무 근성이예요. 키는 삐쭉하게 덩치는 있고 철갑을 두른 듯 생기긴 하였지만 소나무에 불붙여봐 죽어. 다음해가 되도 않올라와
•여자를 만든 이유?
1.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었다.......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2. 그를 돕게 하려고 만들었다....... 소나무 옆에 갈대를 심어두면 소나무가 더 잘 자랍니다. 바람이 불때 마다 사스락 사스락 속삭여 주면 소나무가 얼마나 잘자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갈대가 말라 비틀어 죽으면 소나무도 따라 죽어요. 남자를 도와주는 여자 헬퍼입니다.
여성분들이여 남자를 잘 도웁시다. 좀 어리철철해보이고 사랑이 먼지도, 여자가 먼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남편인데 도와주면 때가 되면 다 알아줄 날이 올것입니다.
5. 부모를 떠나 결혼하여 살 존재(가정의 기원)
“남자가 ①부모를 떠나 그 ②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8)
이 말은 남자와 여자가 어느 시기가 되면 부모를 떠나 서로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앞의 4번째의 내용을 보충하는 말, 더욱 밝혀주는 말입니다.
• ①부모를 떠나 ..... 보모를 떠난다는 말은 독립성을 말합니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부모의 품안에서 더 이상 있지말고 독립하라는 것입니다. 얻어먹지 말고 부모 유산이나 바라보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하여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립하라는 것이지요. 신문에 보니까 어떤 지체장애인인데 집안도 꽤 괜찬은 사람인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의 도움없이 살고 싶다고 아예 그 집을 나와서 혼자 밥해먹고 빨래 빨아입고 살아보겠다고... 밥 한번하고 빨래 한번 하면 아침부터 저녁해가 다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야 독립을 배울 수 있다고 아직 결혼도 못했지만....
요즘 세대는 다행히 부모를 떠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0년 전만해도 아니 50년 전만해도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몰랐답니다.
저희 부모님이 할아버지하고 같이 살때에 할어버지가 저의 아버지, 어머니한테 그랬답니다. 저의 아버지는 집신을 엮을 줄 몰랐는데 할아버지가 “애야. 너희들 내가 죽으면 짚신을 누가 만들어 신을래?” 저의 어머니가 그 소릴 듣고 정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짚신 만들거 생각하니 그렇게 큰 걱정일 수 가 없었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몇백켤레 만들어 놓고 돌아가시면 되잖아요.” 부모를 떠나독립심...이건 바꾸어 말하면 자식이 부모를 떠날 수 있도록 부모는 자녀를 바로 교육하여야 한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생 먹을 고기잡아 놓고 죽을 생각 하지 말고 고기 잡는 법가르쳐 주어라. 평생 신을 짚신 다 만들어 놓고 죽을 생각하지 말고 짚신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라. 그래야 아이들이 부모를 떠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이고 훌륭한 어부가 될 수 있는 비결이겠습니까?
저는 큰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 열심히 공부해라, 네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다 사줄테니까 학원도 보내주고 할테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네가 원하는 대학을 가라. 대학까지는 시켜주지만 그 다음부터는 네가 벌어서 해결해라 결혼도 네가 벌어서 갈 것이고” 그랬더니 공부를 그런대로 남에게 크게 처지지 않을 만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뭐합니까? 신문에 보니까 미국 유학갔다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하고 죽이기도 하고..... 이거 안되겠다. 빨리 신앙교육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친구들하고 주일학교때부터 교회에 다니기도했지만 그거가지고는 어림없거든요. “야, 다음주부터 체계적으로 성경공부하자” “아빠, 대학 들어가서 할께요” “안돼, 그때되면 네 머리가 굵어져서 아빠 머리위에 올라가 있을걸”처음에는 시군퉁하여서 억지로 참석하더니만 요즘은 제법 참석도 잘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조금식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네 부모를 더나라. 부모를 떠나는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결혼을 해서 한집에 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부모를 떠날 훈련을 한번도 받아모지못한 사람이 부모를 떠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되면 자기탓이요 못되면 부모탓으로 돌리고 부모를 원망하고 신문에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겁니다. 부모를 떠나는 훈련없이 시간에 밀려 결혼하여 결국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에게 부모를 떠나는 훈련을 어떻게 시키고 계십니까?
자녀가 100점짜리 시험지 몇장 가져다 주는 것이 훈련의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으시는지요. 참 가치관의 훈련 이것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찬송가를 집안에 틀어주시기 바랍니다. ... 자기도 모르게 교회음악을 즐겨듣게 되고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찬양집도 좋지만 찬송가가 더 좋습니다. 고풍스런 인격으로 변하여 갈 것입니다.
항상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매일 자녀와 성경공부를 하십시오. 매일이 어려우면 1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자녀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자연의 이치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이 연구하는겁니다.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자녀의 고민이 무엇이고 그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알게 되고 부모와 자녀간에 정이 더욱 두터워지고 자녀는 부모를 더욱 존경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한목소리로 따라해 보실까요? “부모를 떠나는 훈련을 시키자”
• ②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아내와 연합한다는 것은 무슨말입니까?
연합은 상호 이해와 신뢰와 인정과 헌신을 바탕으로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식장에서 주례사가 “이제 홍길동군과 성춘향양이 결혼하여 한몸으로 연합하였기에 성혼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연합입니까? 물론 이것도 연합은 연합이지요. 그러나 그런것 보다는 본질적으로 이해와 신뢰와 상대방을 믿어주는 연합,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 부부 가운데는 법적으로는 연합하였는데 마음으로 연합하지 못한 부부가 있습니다. 불행한 부부지요. 이런 부부는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이지만 교회와 사회와 모든이에게 불행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부부간에 연합이 잘 되어지고 있습니까? 저 사람이 내 신체의 일부이다. ‘내 아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선악과 먼저 따먹은게 아닙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신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서 나에게 주니까 내가 먹은 것 뿐입니다” 공동의 잘못을 아내에게 미루어 버리는 경우는 없는지요. 우리 엡 5:25-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남편들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작)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얼마만큼 사랑하여야 하는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린 것 같이 죽도록 사랑하라.
다음에는 여자가 어떻게 남편에게 대하여 하는지에 대하여 보십시다. 엡 5:22-24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죽음을 내놓기가지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대하는 것을 주님께 순종하듯하라. 하나님께 순종하즛하라. 이거 쉬운게 아니지요. 상당히 수준있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까지만 이르면 이것처럼 쉬운것도 없습니다.
제가 봉사하던 교회에 괴한이 침입하였습니다. 괴한이 교회사모님을 칼로 위협하고 경찰이 목사님 사택을 감쌌습니다. 경찰도 그 괴한에게 가까이 닥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목사님이 목숨을 걸고 그 괴한에게 닥아갔답니다. 왜?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여보시오, 당신 칼을 가지고 나약한 아녀자를 위협하지 말고 날 찌르시오. 당신이 요구하는게 무어요. 냬목숨이 필요하다면 내 목숨도 주겠오. 난 순교할 각오요” 딱 그랬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닥아가자 괴한은 사모님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괴한은 붙잡혔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죽기를 각오하였더니만 그후로 아내가 남편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아내가 위험할 때 같이 죽는다. 이거 참 좋은거지요. 아내없이 혼자 살며 고질꼬질하게 맥못추는 것보다는 아내를 위하여 같이 죽겠다고 하는 자세가 차라리 더 좋은거 아니겠습니까? 여자가 죽고 없는데 아까말씀드린대로 생명이 죽었는데 남자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죽으면 남자들은 화장실가서 웃는다고 하지요? 그 남자들 조강지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그러지요. 새장가 가보세요. 그전보다 나을거 하나 없어요.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거 굉장히 중요한 말이지요.
6. 하나님께로부터 문화적 사명을 받은 존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공중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부부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무엇을 행할 것이가?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파고 잘 일꾸어 집을 짓고 공중에 나는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라. 보존하라. 산을 푸르게 만들어 가꾸고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여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 그래서 사람은 문화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키고 부모와 자녀가 봉사하고 성장하고 교육받고 자라며 행복한 가정을 일꾸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것이 참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에덴동산이 될 줄 믿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자기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흙으로 빗어 만드시고 생기를주시고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여 남자를 돕는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아담, 곧 흙이요 사람이었는데 하와 즉 생명을 다시 접붙여 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힘을 합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우주 만물을 갈고 잘 다스려야 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였고 타인과도 기쁨의 관계였고 자연과 조화의 관계였습니다. 서로 앙숙의 관계가 아니라,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미움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요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이와 같은 축복의 대로가 열려 있었습니다.
책을 보지 말고 오늘 배운것을 암송해 봅시다. 6개의 그림을 생각하면서 시작
(아래의 박스를 통하여 오늘 배운것을 복습하도록 유도한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다음 시간에 오실 때도 오늘 배운 것 요절 6개를 모두 암송하셔서 오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을 위하여)
•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즉 죄로 말미암아 이 문화적 소명을 이끌어갈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 선악과는 도대체 어떤 나무인가? 어떻게 생긴 열매였기에 아담과 하와가 따먹을 수 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그 실과를 따먹으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을까? 말렸으면 죄를 짖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면 모두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조금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것인가? 잃어버렸으면 앞으로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으면 과거의 죄짖기전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갈 수 없는가?
이런 문제를 다음 시간에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죄악론
•이끄는 말
우리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는데 그 가운데는 죄와 관련된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장난삼아 편지를 써서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에게 똑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은 모두 일률적이었습니다. “모두 탄로났습니다. 속히 몸을 피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그 이튿날 이 유명인사 20명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런던에서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
처음 에덴동산에 인간이 지어졌을때는 아직 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동산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나무의 실과는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경고의 말씀을 잘 지키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죄라고 하는것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거기 한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 하나님의 경고
“①동산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②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마라 ③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
이 경고를 따르는 이상 그곳은 행복한 동산이었습니다. 거기 요절을 한번 살펴봅시다.
•①‘동산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이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과 동산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님께서 ‘동산에서 네가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보아라’. 무한한 자유를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②‘‘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이는 무한한 자유가운데 딱 한가지 자유만을 제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먹는 날에는 죽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형벌을 받게 된다는 언약을 말하는것이지요.
•우리는 ①②③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요점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언약의 이행 여부에 따라, 다시 말해 이 언약을 지키면 영생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생활을 소유할 것이요, 지키지 못하면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자업자득’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은 그렇게 하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이 언약을 무슨 언약이라고 하느냐? 다같이 한목소리로 합시다.“ 행위언약” ( 행위언약 ) 그렇습니다.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행위언약에는 3대 요소가 있습니다. 일명 “행위언약”의 3대 요소를 알아봅시다.
1)언약 당사자에 있어서 ...... 언약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언약의 객체는 아담입니다. 이때 아담은 자신의 허리를 통하여 출생할 모든 인간들의 후손들까지 대표해서 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2)언약의 내용에 있어서 ...... 언약을 이행하면 영생, 그러나 이행하지 못하면 사망이었습니다.
영생이란 무업니까? 존재의 영속과 아울러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영원한 행복과 끊임없는 영광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것을 말합니다.
사망은 무엇입니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자연적 사망’(死亡)과 아울러 인간과 하나님과의 영원히 격리되는 ‘영혼의 사망’을 말합니다.
3)언약의 조건에 있어서 ...... 선악과를 언약의 상징으로 하며 그 열매를 먹지말 것을 조건으로 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바로 조건의 전부였습니다. 순종하면 영생입니다. 행복이요 기쁨이요 영원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언약에는 다른 일반적인 언약과는 좀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여러분 이 선악과 언양, 행위언약에 대하여 교회에서 수차례 설교들을때 마다 좀 특이하다고 생각된 적은 없습니까? 그 특성을 연구해 본니다.
•행위언약의 특성
1)일방성 ...... 완전하신 하나님은 언약의 제 1당사자가 되시어 제 2당사자인 아담의 동의 없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 그 언약은 좀 지나칩니다. 매일 바라보는 선악과를, 하루에도 12번도 더 바라보이는 선악과를 어떻게 안따먹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술 담배를 먹으면 정녕 네가 죽으리라 그렇게 바꾸어 주십시오” 하나님과 아담이 이러한 대화를 통해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의하고 싶을 겁니다. “하나님, 언약이라고 하는게 쌍방간에 대화도 없이 어떻게 일방적인 언약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건 무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이 언약은 아담에게 형벌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벌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코 아담에게 무리한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년마다 대학입학 시험을 치룹니다. 시험문제낼때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상의하고 냅니까? 학생과 상의없이 출제자가 알아서 냅니다. 이 문제 풀면 합격이고 못풀면 불합격이다. 바로 그겁니다. 이것을 일방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 시험볼때 합격하기 위해서 봅니까? 아니면 떨어지기 위해서 봅니까? 그리고 이 시험이 학생들을 떨어트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며 합격시키기 위함입니까?
(대답을 기다린다) : 합격시켜 대학에 들어가게 함입니다. 결코 떨어지는것이 목적이 아니지요. 아담이 이 언약을 지키면 패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의 정답까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 : 먹으면? 해답 : 죽으리라. 아담은 빤히 바라보이는 합격의 코스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영생의 문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 즉 언약준수 테스트입니다.
2)유효성 ...... 하나님의 이 말씀은 아담때에도 유효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담 때의 시험 문제가 지금도 변하지 않고 똑같이 출제됩니다. 단지 선악과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율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 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5)이라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 법칙은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있으며 주님이 오실 때 까지 변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출제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험때 마다 그 문제를 풀지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였지요. 우리도 그 율법을 못지켰습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행위로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담이여, 왜 당신은 선악과를 따먹었는가?” 원망하고 흉볼거 없어요.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격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상에서 다 완성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4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느니라” 구원에 관한 것은 다음 시간 5, 6과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뱀의 유혹으로 비롯된 죄
“①너희가 결코 죽지아니하리라 ②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③하나님같이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①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이 말은 속임수였습니다. 아담은 육(肉)도 마침내 죽었고 영(靈)도 죽어버렸습니다.
•②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 실제로 자기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에덴에서 추위와 더위도 없이 자연 그대로였고 벗은 것에 대하여 한번도 수치스럽다거나 부끄럽다거나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자연의 강과 산, 오곡백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서로 바라볼때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되었는데 선악과을 먹고 나서는 매사가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느껴진 것이 아니라, 비판의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자연의 아름다움, 세상의 아름다움, 이성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 비평적인 시각의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③하나님같이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될수도 없었지만 혹 하나님처럼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할리 없습니다. 뱀은 속인 것입니다.
3.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되는 죄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①먹음직도 하고 ②보암직도 하고 ③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④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 3:6)
①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②보암직도 하고 ③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때 이미 사단이 그 나무를 먹음직하게 보암직하게 지혜롭게 탐스럽게 보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유혹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3가지 욕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예수님께서 40일 광야 금식기도후에 똑같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1. 사단이 나아와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하라 하였습니다. 돌이 먹음직 스러운 스러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습니다. 진정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은 떡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단은 다시 높은 성정에서 뛰어내리라 하였습니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천사가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받아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 모든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유혹을 물리 쳤습니다. 세번째 사단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는 겁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 하였느니라’ 결국 예수님은 사단을 물리쳐 승리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도 하와가 받은 유혹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돌이 떡덩이가 되게(무엇이든지 먹는다) - 육신의 정욕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다른 사람에게 인기를 얻는다) - 안목의 정욕
∙내게 경배하라(세상 것을 얻는다) - 이 생의 자랑
이상의 유혹은 지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전 인류 죄의문제의 축소판이요 또한 모델입니다.
④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아담도 그 실과를 보았을때에 분명히 하와와 같은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하와는 뱀게게 유혹을 받았지만 이번에 하와는 아담을 유혹합니다. 죄 짓는 사람은 결코 혼자 죄를 짓는 법이 없습니다. 꼭 공범을 만들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런것이 있지요. 자기가 살기 싫으면 혼자 죽으면 되지 어린것 까지 다 데리고 함께 끌고가서 죽는 그런 부모들이 있지요? 동반 심리 입니다. 아이들 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아이들은 그냥 당하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떠날 때가 되면 혼자 조용히 떠나면 얼만 좋습니까? 궂이 그 교회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을 끌고 나가는, 그렇게 해서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야 마음에 들 수 도 있고 않들 수도 있는건데, 그리고 정 자기 체질하고 맞지 않으면 체질 맞는 곳으로 조용히 떠나면 누가 뭐라 합니까? 떠날 때 꼭 동반행동을 하는 거지요. 하와처럼 정 먹고 싶으면 혼자나 먹으면 될 것을 괜히 남까지 먹게 만들어 가지고 함께 고생시키는....
아니, 그렇다고 제가 남자로서 여자를 원망하는 뜻에서 하는 말씀은 아니예요(모두 웃음).
자, 이제 1, 2, 3을 통해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 4번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 에 들어가기 전에 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잠깐 ‘죄’란 무엇인가를 연구해봅시다.
1. 성경적 죄의 개녑
(1) 성경적 용어
◦ 구약 = ‘하타트’(תאטח):표적에서 벗어나다. ‘페사’(עשׁפ):복종할 권위에 도전함
◦ 신약 = ‘하마르티아’(άμάρτια):표적에서 벗어나다 라는 뜻입니다. 옛날 로마에서 활을 쏠때에 군인이 화살을 과녁에서 빚나가면 과녁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하마르티아’ 그렇게 소리 칩니다. 빗나갔다는 소리지요.
(2) 죄에대한 성경적 정의
인간에 대한 죄든지 하나님에 대한 죄든지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것을 의미합니다.
2. 죄의 성격
(1) 특별성
재해나 질병까지 포함하는 ‘악’과는 달리 항상 인간으로 말미암는 죄는 그것을 범한 인간에게 반드시 도덕적 책임이 돌아가게 됩니다(창 3:1-6, 사48:8, 롬 1:18-32)
(2) 절대성
ㅇ니간에게는 도덕적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의무인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이미 악을 행하는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회개한 의인이아니며 모두 악인인 것이다(마 10:32, 12:30, 눅 11:23, 약 2:10)
(3) 적극성
죄는 소극적인 선의 결핍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다(창 3:5). 이와같이 죄에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주권을 박탈하려는 적극성이 내포되어 있는것 입니다(출 20:3-5, 골 3:5)
(4)반율법성
대인(對人) 관계의 죄도 결국은 이를 금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이므로 반율법적입니다.
(5) 죄책(罪責)과 오엽(梧葉)
죄는 반드시 형벌을 초래하며(롬 6:23) 인간성의 부패와 완악함을 남깁니다(렘 17:9)
(6) 죄의 자리
믿음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듯이 죄 또한 죄의 자리인 마음, 즉 인간의 지정의를 포함한 전 인격에 악영향을 미칩니다(마 15:19)
(7) 죄의 외향성과 내향성
행동되기 전의 악한 마음도 죄입니다(마 5:22, 28, 갈 5:24).
이 내부적인 죄는 필연적으로 외부적으로 나타나고 외부적 죄는 내부적 죄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발생케 합니다(롬 7:7, 갈 5:17).
3. 죄의 기원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원래 사단을 위시한 천사들의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말미암았으며(유 1:6), 그것이 인간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창 3장).
(1)최초의 범죄의 상황
먼저 타락한 천사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2) 범죄의 책임
아담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3) 죄의기원
최초의 범죄가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에 의한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아담 자신의 교만이 직접적인 기원이 됩니다.
4. 죄의 결과
사단의 하수격인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었고(창 3:14) 사단은 머리를 상하게 되었다(창 3:·15). 도한 하와는 해산의 수고와 남편에게의 종속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창 3;16) 아담은 수고하는 인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창 3:17-19). 이러한 죽음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육적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을 나타내는 영적 죽음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도 엄청난 모순과 갈등이 야기되게 되었다. 더구나 인간의 타락의 결과 자연계에도 엄청난 부조화와 질고가 초래 되었다(창 3:17-18, 롬 8:20-22)
5. 죄의 전가(轉嫁) ...... 여기서 본 교제의 4번째 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시다.
4.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아담의 죄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후손에게도 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를 죄의 전가(轉嫁)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현대적 법률 상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지만 성경은 이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나쁜 행동을 하였다고 할때 그 부모에게 전혀 책임이 없을까요?
죄의 전가의 이유는 ‘대표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 자격으로 언약을 맺었다가 범죄 하였으므로 그 죄의 영향이 온 후손에게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이다. 이는 첫째 사람 아담과 대조되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가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살린다는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45-49)
6. 죄의구분
(1)원죄와 자범죄의구분
원죄(原罪) ...... 아담의 모든 후손이 태어날때 부터 가지는 죄(罪)를 말하는데, 불신자는 원죄를 부인합니다.
자범죄(自犯罪) ...... 출생 이후에 개인이 지은 죄로서 원죄보다 그 죄책감이 심합니다. 원죄는 한거지지만 자범죄는 다양합니다.
(2) 자범죄의 종류
①무식죄(無識罪)와 지식죄(知識罪) ...... 알고 지은죄(유식죄)는 모르고 지은죄(무식죄)보다 징계가 더욱 큽니다(눅 12:47, 롬 2:12)
②과실죄(過失罪)와 고범죄(故犯罪) ...... 고의로 짓는죄(고범죄)가 실수로 짓는죄(과실죄)보다 징계가 큽니다(민 15:26-31, 딤전 5:24)
③용서받을 수 있는죄(가사죄,可赦罪)와 용서함 받을 수 없는 죄(불가사죄:불(不可赦罪)
모든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오직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함 받을 수 없습니다(히 6:4-6). 이것은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성령 자체에 대한 거역이므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스스로가 사죄(赦罪)의 기회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죄인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죄는 용서받을 방법 자체를 거부한 것이기에 이 죄를 범한 자는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7. 형벌과 징계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인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십니다. 이 벌은 형벌과 징계로 나누어 집니다.
1. 형벌......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를 간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에게 가해지는 것으로서 영적 사망(엡 2:1), 생활의 곤경(창 3:15-24), 육체적 사망(창 3:19) 영원한 형벌(마 9:47-48, 살후 1:9)입니다.
2. 징계 ...... 믿는 성도들에게 가해진다는점에서 불신자에게 가해지는 형벌과는 다릅니다.
범죄한 성도를 죄에서 떠나게 하여 성도답게 가룩히 살도록 하고 범죄 재발을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공의 충족도 징계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징계는 성도의 익을 위한 것이므로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욥5:17, 잠 3:11). 인내하되 낙심하지 말고 이를 수용함으로서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징계는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당신이 만일 징계를 받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자, 다시 교제로 돌아갑니다.
그림 5번 할 차례입니다.
5. 죄는 욕심이 잉태하여 생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여기서 ‘잉태한즉’ 이란 말은 여성의 임신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개인이 죄를 짓는 것을 나타내는 듯으로 쓰였습니다. 이 요절의 뜻은 죄된 인간의 본성이 사람의 마음을 죄악의 길로 인도하여 죄악이 점점 깊어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 죄악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지요?
나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 어떤 유혹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시험이 나를 자꾸 넘어지게 합니다. 그럼 이 시험은 누가 주는것인가요? 시험은 하나님이 주는것입니까? 아니면 사단이 주는것입니까? 시험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Test(테스트)와 Temptation(유혹)입니다.
‘테스트’와 ‘유혹’의 차이를 연구합시다.
(이것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게서 오는시험 Test |
사단에게서 오는 시험 Temptation | |
시험의 근원 |
하나님 |
사단 |
시험의 장소 |
사람의 외부 |
사람의 마음 |
시험의 원인 |
하나님의 목적 |
사람의 욕심 |
시험의 목적 |
믿음의 연단 |
실족 |
시험의 방법 |
시련 |
유혹 |
시험의 결과 |
영생 |
멸망 |
(강사가 추가해서 강의)
6. 죄의 삯은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삯’은 정단한 노동의 대가로 받는 보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죄를 짓는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代價)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이를 능가하니 곧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 대하여서는 저의 피 값을 보시고서 사망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은사(恩賜)는 ‘카리스마’(Χάριϭμα)는 ‘아무런 조건없이 주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조건을 가지고 주는 것이라면 ‘카리스마’=은사(恩賜)라고 할 수 없지요?
결론
자, 이제 죄악론, 죄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원인은 무엇이고 또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자. 우리는 항상 죄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항상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복습 하고 마치겠습니다.
계속해서 하루 1요절씩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박스를 통하여 오늘 배운것을 복습하도록 유도한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4. 기독론
•이끄는 말(찬 141장, 1,4절 부른다)
세상에 많은 위대한 선각자들이 왔다 갔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큼 오해와 시기와 비판을 많이 받은 분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하나님 같았고 반대로 하나님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 동네의 혼인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다니! 큰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채우라” 사람들이 깊은 생각없이 금냥 돌항아리 6개에다가 물을 가득채웠습니다. 예수께서 “주방장(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을 겁니다. “무슨 물을 6항아리씩이나 주방장에게 갖다주라고 그러지?” 어쨌던 시키는대로 갖다주었습니다. “주방장님, 여기 물입니다” “웬물?” “나도 몰라요. 누가 갖다 주래요” 주방장이 예감이 이상해서 물을 찍어먹어보더니만 “야, 이거 포도주다. 기가막히네” 주방장이 “야, 이거 신랑이 보내온거야? 거 신랑 이리좀 오라고 해”신랑이 오니까 “야, 다른 잔치집에서는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놓다가 취하면 나쁜 포도주를 내놓는데 이 집은 가면 갈 수올 좋은 포두주를 내놓는군요”하고 신랑을 칭찬합니다. 신랑은 자다말고 날벼락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밖에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때는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식사도 나누시고 배부르시면 배에서 콜콜 잠도 주무시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저 분은 굉장히 특이한 분이야.....”
그러던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베드로가 총알같이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어떤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도저히 사람의 이성으로서는 고백하기 불가능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의 메시야이시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구주이시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주신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아멘)
그 믿음은 하늘로 부터 온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셨으며 또 어떻한 순서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교제를 통하여 순서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은 감동적으로 역동적으로 강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어 소개되는 신적 권의의 예수님에 대하여 신비감을 가지게 될것이다. 만일 이야기 형태나 설명식으로 강의하면 실패한다)
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먼저 1번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①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②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③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고 다른 무엇이 또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본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우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①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 여기서 ‘본체’(本体, μορφή, 모르페)는 변할 수 없는 본질적 형체(essential form)를 말합니다. 그리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자체로 선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선재의 지위가 하나님과 동일시 될 성질’이라는 것과는 다른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예수의 위엄과 영광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②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여 자기를 비워 ...... 그리스도께서 본래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지만 그의 그러한 지위를 주장하여 영광스런 존재의 상태를 취하려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은 어떤 필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취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겸손’을 말해 주는것입니다.
•③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말은 인간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모습과 겸손의 신분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명확한 표현입니다.
•④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심자가의 죽음이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비하의 깊이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모양으로는 사람으로 나신 보통의 인간됨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자기를 드리기 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요절은 기독교의 핵심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다른말은 다 이해할 수 있겠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 세상에서 성경을 제외한 다른 책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 천하에 없습니다.
‘말씀’은 진리, 도(道)를 말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늘의 말씀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의 모습을 하고서, 즉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높은 곳을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선교사가 이렇게 전도하였더니 인도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더랍니다.
인도 사람이 “어떻게 존귀하시고 깨끗한 하나님이 이 더럽고 추악한 세상에 내려올 수 있느냐? 우리 인간들이 죽으면 더러운 육체를 벗어버리고 깨끗한 하늘로 가야 마땅한 것이지 깨끗하신 하나님이 이 더러운 세상에 올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그 인도사람에게 말했답니다. 인도사람은 동물을 사랑하지요. 소가 차도로 지나다가 잠깐 쉬면 그 소가 다시 걸어갈때 까지 자동차가 기다리는 나라가 인도 아닙니까? 소뿐만 아니라 개미 하나라도 밟지 않으려고 밤에는 길에도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그랬답니다.
“여보시오, 내 말을 잘 들어보시오. 만일 어떤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밭을 갈면서 이쪽으로 오고있는데 마침 당신 발밑에 개미떼들이 있는 것을 보았으면 어쩌겠소? 그들에게 빨리 피하라 트랙터가 오고 있다. 위기가 오고있다. 알려주고 싶지 않겠소? 만일 당신에게 개미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개미가 되어 그들에게 말려주겠소? 아니면 그대로 서 있겠소?‘
인도사람이 그제야 진지하게 듣더랍니다.
’그렇소.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그 본체의 모습을 버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오셨소. 그리고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위기가 곧 닥칠 것이다’ 하고 외치고 있소. 당신은 그 외치는 소리를 지금 듣고 있는거요‘ 그렇게 전하였더니 마침내 믿더라는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成肉身, 인카네이션) 하였다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방법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어떤 방법과 경로를 통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아래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아기 예수가 태어났지요? 그 아래의 요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3.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예수님
“보라, ①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②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마 1:23)
•①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처녀가 잉태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 처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잉태하였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 마 1:18-23까지 한절씩 돌아가면서 읽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 1:19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마 1:22)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마 1:23)
본문에 보듯이 요셉이 마리아하고 약혼하기로 정하였는데 결혼하기도 전에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남편될 요셉이 얼마나 마리아에 대하여 실망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에서는 여자가 간음을 하면 돌로 쳐죽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어지간한 남자같았으면 돌로쳐죽였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인지라 ‘가만히 약혼을 끈고자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꾸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말합니다. 다같이 20절 봅시다.
“다웟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것이라“(20)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남자를 통하여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피가 전혀 썩이지 않은 겁니다. 깨끗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몸이 아니라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의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지 않고 사람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면 우리의 구주 메시야갸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죄인의 피를 가진 사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말해 배가풍랑을 만났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배안에 있는 사람을구할 수 있습니까? 배 밖의 사람이 생명줄을 던져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동질성의 사람은 동질성의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셨고 모양도 같으셨지만 본질이 다릅니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인간의 피를 받지 않으셨다. 그걸 말하는겁니다. 23절 다시 보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처녀가 잉태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처녀에게 잉태되어 탄생될 것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700년전에 이미 예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7:14을 보십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갑자기 낳은 것이 아니라 예언되었고 준비되었고 마침내 때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무계획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아래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계획이 되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준비되고 계획된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업니까?
•②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임마누엘! 이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계획되어졌고 성취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바로 우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팔을 지금 붙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십시오. 그분이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죽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여러분을 연결시켜드리기 위하여!
연결해서 4번쩨 그림을 보십시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예수께서 죽으신 장면입니다.
요절을 같이 읽습니다.
4.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
“또 ①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
•①십자가로 ...... 여기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이유가 될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합당한 말씀을 봅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자기(아버지 하나님)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통하여,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겼습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사람은 그 땅에서 땀을 흘려야 겨우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인하여 마땅히 죽었어야 했습니다. 왜 죽었어야 했는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용서해 주실 일이지 왜 죽여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행위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하신 것은 지켜야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할 마땅한 존재인데 하나님께 그 인간들에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죽어야할 대신에 다른 짐승을 대신 죽여라” 바로 그겁니다. “네가 피를 흘려야 할 터인데 대신 다른 짐승이 피를 흘린다면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렇게 관용을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고 사람들은 그 방법을 행하였습니다(레 1-5장). 그들은 최소한 대속죄일(레 16장)을 통하여 1년에 한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는 다소 미흡한 제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어야 할텐데 사람이 아닌 짐승이 죽어야 하는 어딘가 미흡한 제사였습니다. 미흡하였기 때문에 제사의 유효기간이 겨우 1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3-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 위하여 유효기간이 없는 영원한 한 제물을 준비하셨으니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짐승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그래서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마 1:21)
그런데 이 십자가의 처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힘든 죽음이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죽을 때에 그토록 힘들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체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십자가 사형제도는 로마시대의 제도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입니다. 너무나 잔인한 것이어서 혹 극악한 살인자라 할지라도 역적모의를 했다 하더라도 로마사람에게는 정욕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로마가 지배하던 다른 민족백성들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한 죄수가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가 매를 맞는겁니다.
채찍을 맞아야 하는데 외가닥의 채찍이 아니라 아홉가닥의 채찍으로 맞는데 그 가닥에는 날카로운 세부치가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내려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것이지요. 여기서 대부분의 죄스들은 정신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물을 떠다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또 때리고 그러지요
두번 째 당하는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메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이라고 하는 언덕까지 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쌀 한가마 반의 무게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못박혀 죽을 십자가를 지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올라가는 겁니다. 왜?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채찍도 내가 맞았어야 할 채찍이었고 십자가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였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대신 저주신 것입니다.
골고다에 끌려 올라가면 그 나무에 양손에 못이 박히고 얼굴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 꼭데기에 메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당할 것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시는 것입니다.
못박힌 손과 발에서 처음에는 홍수와 같은 피가 흐르다가 그 피가 다빠져 나가면 뜨거운 땡볕에 말려져 죽어갑니다. 내가 당할 것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숨이 떨어졌는지 않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병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확인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다 이루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시키시기 위하여 한 방울의 피를 남기지 않고 다 쏱고 죽게되시면서 하신 말 “다 이루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 가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찬송가 141장을 조용히 부르자)
5.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①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②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③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4번 그림에서 십자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렇게 그냥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어찌보면 허무하기도 하고 또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또 당시의 제자들이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저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정말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나? 하나님의 아들이었나?” 의심도 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 훨씬 전부터 수 차례에 걸쳐서 미리 예언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고 3일 만에 부활 할 것이다”(마16:21, 17:22-23, 20:17-19)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은 금요일 오후 3시(제 육시, 마 27:45)였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무덤에서 하루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주일 새벽이 닥아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예수께서 평소에 “십자가에 죽은 후 3일만에 부활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하는 말씀이 생각이 났을 겁니다.
그 장면을 한번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마 18:1-10)
두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았습니다. 돌문을 지키던 병사가 무서워 떨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예수를 찾아 이곳에 왔구나, 그러나 여기를 보라.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너희는 속히 이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라. 그곳에서 예수를 볼 것이다” 여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달음질하여 갑니다. 이 때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두 여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살롬! 평안하뇨?”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당신께서 부활하신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부활하셨군요, 오 예수님, 당신께서’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그리고 무섭기도 하고, 어찌보면 유령은 아닌가 생각도 들었을것 아니예요? 이 때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무서워 말라. 어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
제자들은 로마 군병들이 무서워 갈릴리는 커녕,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챵 100km 정도 떨어져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는 커녕 문 밖에조차도 못나가고 숨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제자들에게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주일날입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요 20:18) 그리고 예수님을 뵙고 이야기 한 것을 다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냘 저녁이었습니다(요 20:19)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을 들어닥칠까 무서워서 방문을 꼭 꼭 칭칭 닫아걸고 모여 있는데 바로 그때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로마군병들과 유대인들을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하여 나타나신 것입니다. 로마병정을 피하여 문을 잠구었으니 얼마나 튼튼히 잠구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안에 예수께서 문도 열지도 아니하시고 그냥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첫 인사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창찔린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창자국을 보고 놀라와하였고 정말 예수님이신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제껏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안도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제 마음이 놓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숨을 내 쉬며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는것을 보고, 예수님이 이제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고 이제는 용기와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 마침 그 장소에 없었던 도마가 돌아왔습니다. 도마는 지금 혹시 자기가 돌아오는길에 누가 뒤쫓아 오는 사람은 없나 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마음이 콩알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생각했을 겁니다. “빨리가자. 지금쯤 형제들이 가슴을 조아리며 숨을 죽이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로마군병들이 지금 온 집집마다 다 뒤지면서 혈안이 되고 있으니 더 깊이 깊이 숨으라고 일러줘야지”하며 왔을겁니다. 그런데 방안에 탁 들어수는 순간 어땠겠습니까? 상상이 갑니까?
들어서는 순간, 방안의 제자들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도마, 어서오게, 지금 방금 예수님이 막 다녀 가셨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네!”
‘무슨 소리야? 부활이라니, 다시 살아나셨단 말인가?“ ’그렇다네. 우리 모두 그 창자국을 보았다네”
의심 많은 도마가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겠노라”
제자들이 도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와 하였습니다. 어찌 우리 말을 저렇게 못믿을까? 제자들이 안타까와 하였습니다.
그런데 8일 후에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가 그제서야 말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만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나중에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며칠동안? 40일 동안 함께 계셨습니다.
그동안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르리라”(행 1:4-5)
예루살렘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기에 그 곳을 떠나지 말라 하였을까요?
1.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곳입니다.
2.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입니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나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자 마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우더니 하늘로 올라 가십니다.
제자들이 너무 뜻밖의 일이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어, 어, 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천사들이 나타나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예수께서는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루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사건은 11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마리아에게 또한 그 밖의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건 우리에게 믿으라고 설명하는 말이기 이전에 단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눈으로 본 기자가 기록하였던 실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하였을때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에게 두려움이 엄습하였을때에 우리에게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축복은 그 사실을 믿은 자에게는 예수님 처럼 죽어도 살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아멘)
6. 승천하셨다가 다시 구름타고 오실 예수님
“볼지어다 ①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②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③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계 1:7)
이렇게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말씀 그대로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때에는 방법이 있습니다.
•①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구름을 타고 온신다는것입니다. 왜? 가실 때의모습이 구름을 타고 가시는 모습이었기 대문에 오실때의 모습 역시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하필 구름을 타고 오십니까? 예수님이 무슨 홍길동인가요? 구름을 타고 오시게? U.F.O를 타고 오신다면 더 과학적 아닐까요?
그럼 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을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과학적인 힘으로 오시지 않고 인간의 능력 안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초능력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문선명은 비행기 타고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입니까? 또 예수께서 오실때는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제껏 각인의 눈, 40-50억의 인구의 각자의 눈이 그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미 예수께서 오셨다고 하지요? 그러나 아무도(각인의 눈) 구름타고 오신 예수님 본적이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우리 모두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찌른 자들은 누구일까요? 병정을 비롯하여 로마 정부, 더 나아가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찔렀다는사실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1번은 ..... ( )
2번은 ..... ( )
3번은 ..... ( )
4번은 ..... ( )
5번은 ..... ( )
6번은 ..... ( )
그밖에 질문받겠습니다. 기도와 함께 마친다.
5. 구원론(구약편)
•이끄는 말
(현장의 실정에 맞도록 한다)
1.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하셨는데
뱀은 말하길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합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는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하와야, 어찌 이렇게 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벌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기서 ‘뱀의 후손’은 사단과 그의 추종 세력을 말하고 ‘여자의 후손’은 처녀의 몸에서 탄생되실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단과 예수님은 원수가 되어 싸우게 되고 예수께서 마침내 승리하여 사단의 머리를 밟아버리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단은 예수의 발끔치를 다소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시복음(原始福音, Proto evangelium) 이라고 합니다. 바로 최초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침내 실현될 때가 올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바로 그때 입니다.
(상하게 하다의 단어 비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 상하게 하다 = crush, 부수어 버리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상하게 하다 = bite, 물어띁다
(선악과 범죄 이후의 하나님의 구속 역사)
1. 선악과 |
2. 원시복음 |
3. 가죽옷 |
4.에덴추방 |
5. 가인과 아벨 사건 |
6. 셋 |
7. 노아 |
8. 아브라함 |
9. 다윗 |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직 |
최초의 복음 |
예수의 피 구원 예표 |
그룹과 화염검으로 막음 |
가인은 자기 의로 아벨은 믿음으로드림 (히11:4) |
아벨대신 주신 ‘다른 씨’ |
심판중 노아 식구만 구원 |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선택 |
소금언약 (대하 13:5) |
(1) 선악과 ......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직하였던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이 선악과의 유혹은 아담에게만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해당된다. (2) 원시복음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한다. (3) 가죽옷 ...... 가죽옷은 짐승을 잡고 피를 흘린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많은 방법 가운데 왜 굳이 피를 원하셨을까? 인간은 죄를 지었고 ‘피’를 흘려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피흘리는 대신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짐승의 피’를 대신하신 것이다. 짐승의 피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고 예수님의 제사는 완전한 제사였다. (4) 에덴 추방 ...... 이것은 형벌이라는 의비보다는 징계라는 의미가 강하다. 형불은 지옥을 말한다. (5) 가인과 아벨 ...... 가인은 자기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자기 양을 잡아 드렸다. 자기 농산물을 드린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피없는 제사였기 때문이다. 가인은 아벨에게 양을 구해서 드렸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곡식제사(레 2장)는 항상 피 있는 짐승제사와 함께 드렸다. 오늘날의 농촌에서 농부가 곡식을 드리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제물을 드릴 수 없고 오직 예물만 드릴뿐이다. (6) 셋 ....... 하나님의 사람 아벨이 죽고 가인은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하여 아벨 대신에 ‘다른씨’를 낳게 하셨다. 다른씨 ‘셋’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어 가신다. (7) 노아의 구원 ......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다. 노아의 의는 믿음이었다(히 11:7). 노아의 가족이 구원 받은 것은 노아 한사람 덕분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있었다. (8) 아브라함 ...... 아브라함은 갈데아에 있을때에 부름을 받았다(창 13:1). 이는 바브라함의 행위에 대한 보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 않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9) 다윗 ...... 다윗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다윗 나라가 영원하리라 언역하셨다. 이를 변할 수 없는 ‘소금 언약’이라고 한다. |
2. 가죽 옷을 통한 구원 예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아담 사건이후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하시고 나서 하와에게 저주하십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다시 아담에게 저주합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 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따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엄청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리나 하나님은 그 불쌍한 죄인, 아담을 그냥 형벌에 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친히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어 사랑의 구원을 베푸십니다.
여기서 다시 제 1과에서 연구하였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불순종 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반하여 사랑은 형벌을 내릴 자에게 용서하는것을 의미한다고 이미 1과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을 쫓아내는 형벌을 내리심과 동시에 아담에게 다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옷을 만드실 수 있는 방법가운데 왜 하필 짐승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셔서 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여기 짐승의 피는 바로 제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만드시기 위한 방법이 바로 짐승의 피 입니다. 좀 바꾸어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려면 죽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짐승을 대신 죽이셨고 그 피를 아담의 피 값으로 받으셨습니다. 이 피는 마침내 신약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1번 사건, 즉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하리라’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예표 하였던 것 처럼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3. 노아 방주를 통한 구원 예표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7:1)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천신만고 끝에 자리를 잡아 그 곳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꾼이 되었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가인의 재물은 받지않으시고 아벨의 재물만 받으셨을까요?
이유는 아벨은 믿음으로 들였는데 가인은 믿음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비신앙적인 자세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가인이 질투가 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내 제물은 안받아? 내 아벨 이녀석 그냥 두나봐라”
하나님을 원망한 마음이 아벨에게 돌아갑니다.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쳐죽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형벌을 내립니다.
“네가 이같이 하였은즉 네가 농사하여도 땅이 효력을 너에게 주지 않을 것이며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아벨은 죽고 가인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또 한 사람을 낳게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셋’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아담의 자손이 이어져 갑니다. 그냥 자손이 아니라 구원의 핏줄을 이어져 가는 ‘다른 씨(창 4:25)’라고 하였습니다.
이 셋을 통하여 수 많은 자손이 이어져 갔는데 마침내 노아까지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아때 쯤 와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고 사상이 혼탁하여 갔습니다.
“자, 한번 재미있게 살아보자. 춤도 추고, 술도 먹고, 캬바레, 나이트 크럽도 가고, 하니님의 백성들도 믿지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그런 시대가 바로 노아때 였습니다. 하나님이 화가 났습니다.
“내가 사람을 괜히 지었구나” 한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과 생각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시고 모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다르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노아의 가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합니다. “너는 방주를 지어라 네가 이 세대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의로움이 있음을 내가 보았노라”
마침내 노아는 잣나무로 3층짜리 방주를 짓고 그리고 틈새마다 역청으로 바르고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야, 배 만드는 돈 있으면 차라리 큰 집을 짓겠다”그랬을거 아니예요? 요즘말로 바꾸면 “야, 교회 다닐 돈 있으면 그 돈가지고 아파트 사겠다” “무슨 종말은 종말이고 영생은 영생이냐?”
그러나 노아는 못들은체 방주를 지었습니다. 수 십년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를 비롯한 8명의 식구들, 그리고 짐승들 까지 홍수로 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씨를 항상 예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구속의 역사의맥을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것처럼 방주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방주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노아가 배를 만들어봤자 얼마나 큰 배를 만들어서 지구상의 짐승들을 다 태웠겠나, 아무리 암놈 숫놈 일곱씩을 실었다고 하여도 그렇지 어떻게 다 실으냐?” 의문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표기된 대로 계산해보면(아래참조)
(참고) 노아의 방주 이 방주의 길이는 길이 약 150m-170(미식 축구장 길이의 1.5배) 너비 약 28m, 높이 약 17m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이것이 3층으로 되어있었으니 미식 축구장 만한 것이 3개 정도의 용량입니다. 이 용량은 화물차량 522대의 용적과 맞먹는 크기로서 짐승 125,000마리가 들어갈 수 있는 용량입니다. 한편 현존하는 육상 동물의 종류는 총 17,600종에 달하는데 정한 동물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 암수 한쌍씩 계산하면 45,000마리가 됩니다. 따라서 방주는 45,000마리가 들어가고도 아직 약 2/3정도 남아 있습니다. 남은 면적에는 노아의 식구들은 물론 짐승들이 먹을 식량까지 모두 실을 수 있었습니다. |
4. 다윗과의 언약을 통한 구원 약속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세월이 흘러 마침내 이스라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이 가장 아낀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고 그 위를 견고히 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소금언약’이라고도 합니다. 변질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이 소금 언약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왕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궁극적으로 메시야 왕국에 까지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할 때에 분명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것이지요. 다윗과의 언약이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루어 졌다는것입니다.
이상에서 보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은 ‘언약’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5. 메시야 수난 예언을 통한 구원 약속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러한 언약이 예수께서 창으로 찔림을 당하고 상하심을 당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 700년 경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언은 다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 한번 예언되었습니다.
예언 |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 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2-13) |
성취 |
가룟 유다를 통하여 에수님을 은 삼십에 넘기게 되었다. 유다가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주었다. (마 27:1-8) |
에언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
성취 |
예수께서 창에 찔리심을 당하였고(요 19:34) 그의 제자들은 이를 인하여 애통하였다. |
6.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의 새 언약을통한 구원 약속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본절에서 34절 까지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새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입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없었으며 이제는 ‘새 언약’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세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이 짐승의 피가 아닌 우리 주 보혈로 세워지게 되는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 여기서 날은 종말론적 개념으로 사용된 말로 예수님의 초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 땅에 새 언약을 실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의를 끝내기에 앞서 잠깐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1은 뱀의 멸망,즉 사단의 멸망을 보여줍니다.
그림 2는 짐승의 가죽옷을 통한 구원을 보여줍니다.
그림 3은 방주를 톤한 구원을 보여 보여 줍니다.
그림 4는다윗 언약을 통한 구원을 보여 줍니다.
그림 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리시고 상하심을 통한 보혈의 피를 통한 구원을 보여 줍니다.
그림 6은 새 언약, 곧 복음을 통한 구원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입니까?
한 사람 사람의 이갸기를 듣는다 ( )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 (1) 일어난 모든 역사는 시간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2) 일어난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에게로 촛점이 마추어 지고 있다
(3) 희미했던 복음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4) 역사의 시간이 직진하여 나아가고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즉 복음과 연결되고 새 언약의 성취로 완결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역시는 반드시 전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시간 개념을 비교하여 봅시다.
•기독교와 불교의 시간 개념
1) 기독교 시간 개념
우리 기독교의 시간 개념은 직선개념이다.
처음 : Α |
나중 : Ω |
2) 불교 시간 개념
○
(돌고 돈다)
불교의 시간 개념은 돌고 도는 윤회설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소로 태어나고 소가 다시 죽어서 뱀으로 태어나고
사람이 죽어서 돼지로 태어나고 그런데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 자기 부모를 잡아먹고 그러지요?
저는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이해가 않되는게 있어요. 부모가 죽어서 돼지로 태어나기도 한다면 어찌 그 돼지를 잡아먹을 수 있으며,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요즘에 보니까 돼지가 아니라 진짜 부모도 잡아 죽이는 시대라고 하니까, 거 자기 부모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는 돼지 잡아먹었기로 서니 뭐 그리 큰 문제인가? 라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지요. 그런데 한 사람이 죽어서 돼지 새끼로 태어났다면 한마리가 태어나야지 어찌 12마리도 넘게 태어납니까? 이건 수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거지요.
우리는 시간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을 알게 된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어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얼마나 간단하고 명백하고 정확한지....그리고 예수 믿으면 영생에 들어가고 아멘입니까? (아멘)
자 마지막 그림을 보면서 마치도록 합니다.
모든 구속의역사가 어떻게 완결됩니까?
바로 ‘새언약’을 실현함으로써 마치게 됩니다. 새 언약은 어디에서 연결되는가? 바로 신약에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다음시간에 새 언약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에 나타난 구원론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친다)
6. 구원론(신약편)
•이끄는 말
지난 시간 제 5과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구원론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오늘 제 6과에서는 신약편에 나타난 구원론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문을 열면 예수께서 들어오심
구원이 길을 제시하는 말씀 가운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 이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들어 오시며 주님은 우리와 함께 더불어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려고 할 때에 우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절한다면 주님께서는 들어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으시고 사랑이 없으셔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아니 받아들이고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로보트라든지 그런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받아들이고 아니 받아들이고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인간이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것은 매우 공정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강압적으로 우리를 몰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아니 원망조차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원망조차도 못하도록 역시 비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실테니까요. 마치 컴퓨터에 입력된 기계처럼 “주인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매우 감사하게도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모든것을 선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문을 열 것인가? 열지 않을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말것인가? 예배에 참석할 것인가? 말것인가?” 이러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서는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엡 1:4-5)는 말씀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 3:20)말씀은 인간쪽에서 조명된 말씀이고, (엡 3:4-5)말씀은 하나님 쪽에서 조명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는 구원에 대한 모든 행위가 우리 의지대로 마음대로 하는것 같은데 전능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상은 하나님의 예정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이해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해를 돕고자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인간)
여기 두개의 톱니바퀴가 있습니다. 큰 톱니바퀴는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작은 톱니바퀴는 인간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림에는 표현이 잘 되지 못하였지만) 이 두 톱니바퀴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간 톱니바퀴도 자기 임의대로 움직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작은 바퀴는 큰 바퀴의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바퀴가 서버리면 작은 바퀴가 제아무리 움직이려고 하여도 움직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작은 바퀴에도 동력이 있어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합니다.
이 두 관계를 다른 방향에서 이해를 해봅시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부모에 의하여 보호받고 간섭받고 또 교육받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밥먹고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가는 것 같은데 그 배후에는 부모가 일일이 간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구원의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명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살피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 순서라기 보다는 논리적 순서일뿐임을 명시하시기 바랍니다.
1)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
성경에는 구원을 받는 순서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롬 8:30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그 순서를 정할 수 있고 그순서에 따라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소명)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칭의)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영화) 하셨느니라”(롬 8:30)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성화 → 견인 → 영화)
•소명 ...... 성령께서 불러주십니다. 소명은 두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입니다. 외적 소명은 그냥 말씀을 향한 초대를 말합니다. 전도자의 전도를 받는다든지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든지 할때 이를 외적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 그 말씀에 깨지고 내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영접할때에 이를 내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중생 ...... 성령에 의한 내적 소명이 결실을 맺어 죄인의 마음이 변화되고 회심에 이르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회심 ...... 하나님을 만나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심은 중생의 필연적인 결과 입니다. 중생한 자는 반드시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중생이 새로운 탄생이라면 회심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신앙 ...... 믿음이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서 돌이킨 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1) 지성적인 요소 : 말씀을 통해 구속에 대한 지식을 쌓아갑니다.
(2) 감정적인 요소 : 지시을 통해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기쁨과 감격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느끼는 감사가 생깁니다.
(3) 의지적 요소 : 과거의 자기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복음의 진리를 통해 깨달은 바대로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포함됩니다.
•칭의 ......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이 공의가 만족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표출됨으로 인해 죄인의 신분이 바뀌어 의인으로 불리워 지는것을 말합니다.
•성화 ...... 날로 날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변화됩니다.
•견인 ....... 천국을 향하여 궁극적으로 인도됩니다. 한번 하나님에 의하여 소명받았고 그 소명에 응답한 자, 즉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며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도록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견인교리는 카토릭 교회와 알미니안주의가 반대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신앙과 행위에 의하여 가능해진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인간의 구원이 각 성도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그들은 구원의 불확실성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죽는 순간까지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평생을 자신감도 없고 기쁨도 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감사도 없을것입니다. 죽어봐야 알테니까. 그러나 견인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감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은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화 ...... 영화는 죄의 세력과 부패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측면과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간다는 적극적 측면을 가집니다.
또한 각 개인 성도의 사후 영혼 만의 영화까지를 포함한 좁은 의미와 최후 심판 이후의 완전한 영육의 영화라는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좁은 의미에서의 영화 ...... 성도 각 개인이 죽을때에 결국 죄의 세력과 부패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그 영혼이 먼저 영화의 상태에 이르고 후에 육체가 부활때에 영육이 함께 영화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2) 넓은 의미에서의 영화 ...... 성도 각 개인이 죽을 때가 아니라 전 성도가 세상 끝날 그 육신이 부활할 때에 영육이 함께 들어가게 되는 천국에서의 궁극적 행복을 말합니다.
(3) 영화의 시기 ...... 영화의 시기는 성도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은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은 무덤에서 잠자고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모든 성도들과 함께 부활하여 썪지 아니할 새 몸을 입고(고전 15:51-53) 완전한 영화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1) 성도의 영화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발생합니다.(딛 2:13, 요 20:19, 계 21:4)
(2) 성도의 영화는 피조계 전체의 새롭게 하심과 함께 발생합니다.(롬 8:20-21, 벧전 3:12-13)
2.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날밤인 목요일 유월절에 있었던 최후 만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일명 다락방 강화에 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으로서 이 말씀의 뜻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를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말씀을 독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독선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것은 실존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10대 조상 할아버지를 발견하려면 반드시 자기 부모의 족보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할아버지에로 갈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족보를 아무리 뒤져보아야 헛일입니다.
어떤 유명한 신학교의 교수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석가모니를 통하여서도, 마호멧을 통하여서도, 예수를 통하여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산을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 목표는 같은 지점이다”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매우 그럴듯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합니다. 석가모니를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마호멧을 통하여 마호멧의 교훈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를 통하여 마호멧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는 자기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혹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는 구원을 시킬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적이 없고 어떤 신(神)의 위치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서울서 대전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스님과 같은 자리에 앉자 오게 되었습니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여러가지 이야기 끝에 몇가지 물었습니다.
“스님, 정말로 극락이 있습니까?
“극락이 어디 있씁니까?”
“그럼 왜 극락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선행을 할것이 아닙니까? 극락은 바로 우리 마음에 있지 따로 어디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불교를 깊이 들면 극락이 따로 있는것이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물론 우리현재의 마음 가운데도 있지만 죽어서 반드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소가 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와 불교가 다른데 어째서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 여러 길이 있을 수 있씁니까?
3. 예수님외의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 없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2번 연결) 그래서 예수외의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받는다 하지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해탈은 무엇입니까?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는 소나 말이나 고양이나 뱀이나 이런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에 드는 것이지요. 열반은 무어냐? 지옥이나 극락이나 그런 것이냐? 제가 그전에 서울서 대전에 올때 어떤 스님을 만났습니다. 마침 어느 절의 주지 스님이었스니다. 어릴때 대여섯살때에 부터 절에서 무릎꿇고 냉수맛사지 해가면서 정통 수없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정말로 사람이 죽으면 지옥이 있고 극락이 있습니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실제로는 없습니다. 지옥도 극락도 없습니다.”
“그럼, 왜 있다고 말합니까?”
“그렇게 해놔야 사람들이 겁을 먹고 죄를 않지을게 아닙니까? 극락갈려고 착한일도 하게될 것 아닙니까?”
그 분 말은 극락이 실제로 있는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을 만들게 하기 위하여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 여러길이 있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목표는 같은데 길이 다를뿐이라고 하였다지요?’
우리 기독교의 목표 지점은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회복시키고, 아니 회복시키는 것보다도 한걸은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나라의 천국이 우리의 최종적인 정상이요 목표 아닙니까? 물론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현세적인 구원도 있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저 천국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4. 영생은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니이다”(요 17:3)
•구원은 영생이요 영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에 영생을 나타내기 위하여 거북이로 나타냈습니다. 거북이가 영생할 리 없지요. 아마 거북이가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영생에 가장 가깝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로 거북이를 표시한 것 같습니다.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그리고 아는것, 그러면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 믿는것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5.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4번 에서 연결) 영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를 그냥 막연히 알아서는 않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본문에 보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될 때에 너무 피상적인 생각만 가지고서는 약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당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마음으로 믿느냐? 그러면 입으로 시인하여 보라. 당신이 구원의 소망과 기쁨이 있고 확신한다면 그 확신하는증거가 무엇이냐? 혹시 거신 확신 아니냐? 당신은 확신한다고 혹시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착각하고 있는게 아니냐? 입느로 시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그만큼 천국은 실존한다는 것이지요. 입으로 시인할 만큼 실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는사람이 이정도의 고백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정도의 용기는 있어야 증거가 되는게 아니냐? 하는 거지요?
여러분들도 마음으로 믿습니까? (아멘)
그러면 입으로 시인합니까? (아멘)
여기 그림에 보니까 사람이 천국문에 들어가기전에 테스트를 하고 있지요?
“당신 예수 믿소?”
“예, 믿습니다.”
“그럼 한번 입으로 시인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금 시인하고 있지요?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문 앞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곳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반드시 사람이 있는 곳에서 시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한 골방에서 시인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사랑하는 성도들, 그리고 목사님 앞에서 시인하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지요?
언제 합니까?
(사람들이 잘몰라서 대답을 못할 것이다)
세례받을때에 합니다. 세례받은 분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아니 자기가 고백해 놓고도 몰라요? 주님은 나의 구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하잖아요? 형제님은 그런 고백도 않했는데 세례를 주던가요? (모두 웃음)
“잊어버렸어요”(웃음)
잊어버렸답니다. 여러분 자기가 고백한 사실을 잊어버렸다는데 어떻습니까? 잊어버렸으면 구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잊어버려도 있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무게, 1999년 월 일 고백했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고백해봅시다. 고백 자꾸하는것은 매우 좋습니다.
(이런 기회에 다시 한번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위하여 고백하도록 유도한다. 인원수가 많으면 한목소리로 고백하도록 하고 인원이 적으면 한 사람씩 앞으로 나오게 하여서 고백하도록 하면 매우 강의 분위기고 새로와 지고 각성도 되고 매우 좋을 것이다.
6.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구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 2:23-24)
•(고백이 끝나자 마자) 우리 그 아래의 그림을 봅시다. 모든 사람이 이제 천국에 들오왔습니다. 모두 기뻐서 박수합니다. 즐거워 합니다. 우리 요절을 다 함께 읽습니다. (시작)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 2:23-24)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구원받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할렐루야!
나를 구속하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하고 찬송가 493장을 부르며 마친다.
자, 한번 복습하고 마치겠습니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7. 교회론
•이끄는 말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도시 웬만한 곳에 가면 한두개 이상의 교회가 있고 어떤 곳에는 교회촌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자, 그럼 이러한 곳이 교회인가, 아닌가?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인가? 그리고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1.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이 말씀의 뜻은 바로 베드로의 신안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만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절대적인 요소라는것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바꾸면 “예수님,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주 중요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이런 고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이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반석은 무업니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진리’를 말합니다.
‘너는 베드로(ΠέΤρο, 페트로스)라 내가 이 반석(πέΤρα, 페트라)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베드로와 반석이라는 말은 발음이 동의어 입니다. 반석 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는 이를 오해했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추대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 2, 3, 4..... 교황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고 지금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요 예수님의 교회 계승권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 요소는 베드로라고 하는 한 제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라고 시인하는 사람 2사람 이상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다음 아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지금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합쳐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절을 읽겠습니다.
2. 교회의 구성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두 세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모인 곳에 예수께서 함께 계시겠다, 더불어 함께 사시겠다, 이것이 바로 교회아닙니까? 교회(敎會)는 말 그대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곳입니다.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이미 공동체 입니다. 베드로의 핏줄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세로 모인 사람들의 무리, 바로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 기회에 교회란 무엇인가? 조금 더 깊이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라고 하는 말을 성경 원어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에클레시아’(έκκληϭία)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밖으로(εχ, 에크)’라는 말과 ‘불러내다(καλεω, 칼레오)’라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불러내다’ 라는 뜻이지요. 안에 있는 무리 가운데서 몇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불러져서 모인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눈에 보이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라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르기 편하게, “야, 우리 교회가자” 그러지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회의 본질을 다 설명한 말은 아니지요. 그래서 교회와 예배당과의 구분을 우리가 반드시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교회’요.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예배당’입니다.
‘그럼, 목사님, 성전은 무엇입니까?’ 조직신학 가운데 성전이라고 하는 개념은 취급조차도 않하고 있지요. 성전은 예루살렘성전을 성전이라고 말하지요. 왜 예루살렘 성전을 성전이라고 합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구약의 성막입니다. 법궤가 있었고 지성소와 성소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그 안에 들어가 1년에 한차례씩 7월 10일,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곳을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성전의 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인간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찢은 것입니다. 왜? 이제는 성전이 필요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제사장들이 옛날 처럼 짐승을 다시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 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마 27:51 )
하나님이 하늘에서 찢었기 때문에 ‘휘장이 위로 부터’찢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순간 부터 성전 제도는 폐하여 졌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폐하여 졌다는 의미보다 예수님께서 ‘’성전 제도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전’이라는 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굳이 성전이라는 말을 쓸때는 구약적인 성소, 예루살렘 ‘성전’의 개념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성스러운 장소’의 개념으로 쓴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킬때 성전이기도 하겠지요.
자, 이제 말이 바뀌어져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형교회 : 무형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무형교회의 회원은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형교회라 합니다. 무형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유형교회 :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유형 교회 가운데는 알곡과 쭉정이가 썪여 있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함께 썪여 있습니다. 전도도, 봉사도, 헌금도 같이 합니다. 그러나 100% 모두 구원받은 백성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 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 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같이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부터 교회가 시작하였을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선악과 사건 이후부터 생긴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지상낙원 자체였습니다. 죄인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미리 말씀드린 것 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을 백성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가 있기전에 가정이 먼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가정이 교회보다 우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 그 자체가 이미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가정은 교회를 이루기 위한 모임이라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참 된 가정은 가정을 위한 가정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전도와 봉사를 위하여 힘을 모두어 교회의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대학생이 선교를 위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지에서 죽었습니다. 고운 뼈 한상자만을 조국 교회에 안겨 주었습니다. 온누리교회와 그 청년의 가정은 한동안 슬픔에 잠기는가 싶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전도하러 간 청년을 죽였을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 청년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내 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드렸습니다. 내 아들이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친것입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입니다” 아버지는 며칠후 아들이 죽은 그 선교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온 성도들이 은혜의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가정의 행복과 열정이 교회를 위하여, 궁극적으로 말해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라는 말에 앞서 그들의 기쁨이요 감격이요 축복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두레교회에 땅이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자꾸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닭치고 돼지 먹이고 할 땅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땅이 1,000평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성도 한분이 멀리서 두레교회에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예배 마치고 목사님에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저에게는 땅이 있습니다. 그전부터 이 땅을 하나님을 위하여 바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이제 목사님 교회에 내놓고 싶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과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갔는데 며칠뒤에 과연 전화가 왔답니다. 식구들이 모두 동의하고 땅을 드리기로 하였다고. 온 식구가 동의 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만일 가정중심이었다면 땅을 내놓겠습니까? 그 돈가지고 골푸장 만들던가 수영장을 만들든가 할테지.
두레교회 성도들은 기뻐했지요 생전 얼굴도 모르는 분이 내놓은 땅은 2만 5천 평이었습니다. 시가 30억 짜리라지요. 두레교회의 한 성도가 놀라면서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우리 큰일 날뻔 헀습니다.”
“아니 땅이 생겼는데 뭐가 큰일 날뻔 했는가?”
“우리가 1,000평을 놓고 기도했더니 25,000평을 응답 받았는데 만일 10,000평을 놓고 기도했으면 우찌 될 뻔 했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웃음)
이것이 모두 교회 중심이 돠었기에 일어난 놀라운 역사 인줄 압니다. 그렇다고 가정을 무시하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도 교회 못지 않게 중요하지요. 문제는 존재 목적이 중요 합니다.
햐나님께서 우리에게 식구를 왜 주셨을까?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입니다. 가정은 왜 주셨을까?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는 왜 주셨을까?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3. 교회의 지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이 말은 교회의 지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그 뒷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전 12:12-31을 봅시다.
고전 12:12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3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 12:15 /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고전 12:16 /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전 12:17 /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고전 12:18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9 /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 12:20 /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 12:21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고전 12:22 /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 12:23 /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전 12:24 /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고전 12:25 /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고전 12:26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전 12:27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8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0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1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31절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여러 지체 즉, 입, 코, 눈, 손, 발, 머리, 등 각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양과 생김새 그리고 하는 일이 각자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성을 가지고 서로 도우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수 많은 지체, 즉 성도로서 구성되어 있고, 각 지체가 특징있는 직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도우며 협조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연결되어 완전한 통일성을 지닌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만일 예를 들어서
‘눈’이 ‘손’에게 너는 보지도 못하며 도대체 넌 어찌 그렇게 무능하냐? 라고 한다든가
‘머리’가 ‘발’더러 너는 왜 그리 항상 목욕을 해도 냄새가 나고 그러냐? 너는 도저히 쓸모가 없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 입에게 보는 것은 내가 먼저 보았는데 어찌 먹기는 네가 먹냐? 먹지마.
해보십시오. 않먹으면 눈도 죽는거 아닙니까?
만일 손이 얼굴을 닦으면서 ‘나는 매일 닦아만 주고 너는 항상 이쁘게만 하냐?’하고서는 세수를 안시켜줘보십시오. 결국에는 그 사람은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며 마침내 얼굴뿐 아니라 손도 굶어죽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가
“나는 왜 항상 말도 못알아 듣는 어린아이들만 가르쳐야 하는가”
“나는 왜 따지기 좋아하는 청년들만 가르쳐야 하는가?”
“나는 왜 음악도 할 줄 모르는 사람만 가르치는 성가대장이 되었는가?”
‘도무지 못해먹겠다. 그냥 잠이나 자자“
그래 보십시오. 마침내 그 교회는 쓰러지고 말것입니다.
교회에는 다 목사일 수 없습니다
다 장로일 수 없습니다.
다 교사일 수 없습니다.
다 성가대원일 수 없습니다.
우리 28-3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고전 12:28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0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1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 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하였습니다. 이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제일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13장에 연결되는 사랑입니다.
교회에서 모두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좋은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찌 입이 손보다 낳을 수 있으며 머리가 반드시 발보다 낫다고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몸 가운데 가장 잘 깨지는곳이 머리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가장 큰 은사, 가장 제일 좋은 길, 그것은 교회의 모든 일을 할때에 사랑으로 하면 최고하는 것입니다.
4. 교회의 사역자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1)
•본문은 교회의 사역자(직분)를 소개 합니다.
여기에 소개된 직분들은 고전 12:28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1) 사도 ...... ‘사도’(άπόστολο, 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은 자라는 듯입니다. 이는그시르도의 사도들로서 예수님의 12제자와 바울과 주의 형제 야고보를 포함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 ......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입으로 부터 말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요 지접적인 계시의 전달자 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로는 미래를 예견하기도 하였습니다(행 11:28).
(2) 선지자 .....
(3) 복음을 전하는 자 ...... 이들의 임무는 사도들 밑에서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4)목사와 교사 ...... ‘목사’(ποιμήν, 포이멘) 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맡아 영적으로 양육시키고 성장시키며 아울러 거짓 진리로 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사’(διδάσκαλο, 디다스칼로스)는 ‘가르치다’(διδάσκω, 디다스코) 에서 온 말로서 목사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 사모 ...... 오늘날 교회에서 사모의 역할은 대단합니다. 특히 개척교회에 있어서 사모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에 사모라고 하는 직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특징에 따라 사모는 목사님을 돕고 교사의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교회 특징에 따라 강의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가장 이상적인 목자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장 이상적인 목자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예수님을 바라볼때 그렇게 송구스러울때가 없습니다. 나도 예수님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이신 예수님 처럼 그렇게 완벽한 목자가 될 수 있을까? 난 인간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이건 도무지 자신도 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글새서 제가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 반만 따라가게라도 하옵소서”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하실때 예수님처럼 되게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반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그 정도만 되도 사람들이 저를 보면 놀랄겁니다.
“예수님 반만 닮아도 대단하구나!” “한국에서는 최고다!”
다음은 교회의 권징입니다.
5. 교회의 권징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여기 18:15절에서 부터 보아야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 권고를 받아들이면 다행이요 기쁨이요 형제를 얻은 것이지만 만일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한두사람의 증인을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때 증인이 동참하는 이유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두사람의 증인을 동참한 이유는 가해자를 이해시키고 잘못을 시인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한 것이지만 만일 이것이 실패할 경우 다음 단계로서 교회가 개입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처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할 것이며 마지막 단계인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에는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시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만일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이 되면 쫓겨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도 여러 단계에 걸쳐 권고하고 좋게 해결을 바랐지만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교회에서 추방시키는 것입니다. 이같은 조치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한 수단으로 반드시 행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헌법이 생겼습니다.
교회 성도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상에서와 같이 권고할 것이지만 만일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회 헌법에 따라 권징 조례가 행해 집니다.
(여기서 각 교단의 헌법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잠깐 설명해 두면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조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교회와 사역자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권징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잘못하였을때에 교회가 여러분을 위하여 권징을 내렸다면 그 교회는 사명을 다하는 교회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오히려 권징을 내린 결단에 대하여 경외를 갖으시고 그 권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해자에게도 큰 믿음을 가지는 계기가될 것이고 교회도 굳건히 설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교회에서 권징당할 일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 권징당하시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신다면 하늘로서 오히려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권징을 내렸다는 말도 크게 들어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혹 권징을 내렸을때 그 권징을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의 매를 들었다는 생각으로 그 권징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는 성숙한 영적인 성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확언합니다. 권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보통 신앙 인격과 믿음의 소유자가 아닐 것임을!
대개보면 권징을 내리면 “흥, 나에게 권징을 내려? 이 교회 없으면 다른 교회 갈데 없나?”하고 떠나버리는 것을 볼때 아직도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될 때가 멀었다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 그 교회를 떠나고 싶거든 권징 기간이 끝나거든 떠나십시오. 그것이 훨씬 성숙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혹 그 권징이 잘못된 권징이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6. 교회의 사명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시니라”(마 28:19-20)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는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린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이사야서에 예언하였던대로 스가랴서에 예언되었던 대로 나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였고 또 마침내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였다. 도마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 못자국에 넣으며 자신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며 내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확인하였으며 그 옆에서 너희들이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노라.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갈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역사저 배경을 가지고서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우리들에게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시니라”(마 28:19-20)
자,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 지키게 할까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왜 그들을 제자로 삼아서,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할까요?
나를 구원시키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명령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새 소식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이 어찌 들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마치기 전에 초대교회에 일어았던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한번 살펴 보기로 합니다.
□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특징(행 42-47)
1. 경건생활에 힘쓰는 공동체 ......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에 힘쓰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2.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 성도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자가의 재산과 물건들을 모두 내놓아 같이 나누어 썼습니다. 이 것은 어떤 종류의 압력이 아니라 자발적이었습니다.
3.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 ...... 성도들은 누구나 차별없이 떡을 떼고 음식을 먹음으로 주 안에서 모두가 형제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4.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공동체 ......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은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러움과 칭찬을 듣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인생을 허무한 가운데 지내는 저 불쌍한 형제들에게, 그리고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잃어버린 저 불쌍한 우리 형제들에게 참 생명되시며 참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자, 한번 복습하고 마치겠습니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8. 종말론
먼저 교재에들어가기전에 종말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말은 무엇입니까? 끝나는 것입니다. 무엇이 끝나는가? 역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역사도 끝나고 세계 역사도 끝나는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종말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입니다.
1. 개인적 종말
개인적 종말에는 다음 세 가지의 죽음, ①영적 죽음, ②육체적 죽음, ③영원적 죽음이 있습니다.
(1) 영적 죽음 ...... 하나님을 떠난 죽음을 말합니다. 산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 그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하지요.
(2) 육체적 죽음 ......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셨을때에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요 19:30) 육체의 죽음은 그 사람의 ‘존재 멸절’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떠남으로서 육체의 기능이 정지되며 ‘육체는 본래의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별도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잠 12:7)입니다.
그럼 영혼이 돌아가는 별도의 장소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신자의 영혼과 불신자의 영혼의 가는 곳이 각 각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가는 곳은 천국이고 불신자가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에 가기전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때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되고 모든 혀가 하나님 앞에 자백하게 됩니다(롬 14:10-11). 그럼 언제 심판을 받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때에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때에 천국 갈 사람, 지옥갈 사람이 나누어 지는것입니다. 그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에 가 있을까요?
예수를 믿지않은 사람의 영혼은 ‘음부’에 가있고, 믿은 사람들의 영혼은 ‘낙원’에 가 있습니다.
음부는 앞으로 있을 ‘지옥의 모형’이고 낙원은 앞으로 있을 ‘천국의 모형’입니다. 이 때의 음부에 가 있는 사람이나 낙원에 가 있는 사람이나 육체는 무덤에 그냥 있는 상태이고 영혼만 가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무덤속에 있는 육체들이 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은 영육이 다시 합쳐져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고 믿지않은 자들은 모두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요 5:28-29)
2. 역사적 종말(그리스도의 재림)
역사적인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에 되어질 종말과 그 이후에 되어질 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과 그 이후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맺게 됩니다.
(1) 재림의 징조
①복음이 세계에 전파되고(마 24:14)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롬 11:25) 구원받을 자의 대열에 들어온 후에야 재림이 이루어 집니다.
②이스라엘의 회심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롬 11:24-26).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의 회심과 더불어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재림의 선행 조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전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작정한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③대배교(大背敎)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마 24:10). 진리를 그릇되게 전하는 많은 선지자가 등장하고 자칭 구세주라는 거짓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믿는 자들을 미혹케 합니다(마 24:11, 23-24)
④대환난이 있을 것이다(마 24:6-7, 21-22). 전쟁 및 기근,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며 특히 성도들에게 대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마 24:9).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환난의 최절정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극적인 구원을 얻게 됩니다.
⑤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하여 자신을 자칭 하나님, 그리스도라 하는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마 24:23-24). 이때 성도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여 미혹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재림의 식양 (그림을 보면서 번호순으로)
1. 예수께서 권능의 우편에 앉으시며 구름을 타고 오심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과 하늘 구름을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①인격적 재림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 지는 인격적인 재림을 말합니다. 아울러 권능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권능우편에 앉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각인의 눈이 보게 됨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계1:7)
②확인적 재림을 하신다..... 모든 족속이 그분의 재림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합니다. 요즘에는 지구 저편에서 축구를 하여도 동시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지요? 그렇다고 예수께서 재림하실때에 위성 중계로 중계방속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오시기 때문에 중계방송할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이지만 오시는것을 보면 아하,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3.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심, 체질이 땅에 풀어짐
“주의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③돌발적으로 오십니다..... 도적같이 오시기 때문에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내 옆의 아내가 않보일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안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집밖으로 나와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 예수라고 하는 분이 재림하신 다고 하더니만 정말 재림하였는가 봐. 어쩌면 한결 같이 교회다니던 사람들만 사라졌을까?” 옆의 사람이 말합니다 “아 글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고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만 하늘에서 예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어. 그런데 갑자기 여기 저기에서 사람들이 하늘로 그냥 올라가는거야” “나도 봤어” “나도...”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후, T.V.에서 뉴스를 듣게 됩니다. “시청자 여러분 놀라지마십시오. 이제껏 우리가 말로만 들어왔던 종말이 왔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는 모습을 수 많은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한 시민이 우연히 그 장면을 찍은 비디오로 필름을 보시겠습니다.” 그 비디오 필름을 본 세계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맞아, 바로 저 장면이야, 나도 봤어.” :“나도 봤어”
4. ‘예수님의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심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④가심을 본 그대로 재림을 하십니다..... 재림을 목격한 본 사람은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실때의 그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알 수 는 없지만 재림하신 예수님을 보면 “아, 그래 맞아 저모습이 바로 예수께서 처음 승천하실때의 모습이야”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들도 모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⑤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 그 날은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 날을 예언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유혹자들입니다. 과거 이장림목사가 날짜를 예언하고 사람을 미혹하였습니다. 곧 예수가 재림할테니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자신은 큰 재물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6.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⑥완성적 재림을 하십니다. 무덤속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생명의 부활로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죽으면 모든 육체는 무덤에 갑니다. 그리고 영혼은 음부와 낙원에 갑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재림하실때 까지 기다립니다. ‘음부’는 지옥의 모형으로서 지옥에 갈 자들의 영혼이 기다리는 곳이고, ‘낙원’은 천국의 모형으로서 천국에 들어 갈 자들의 영혼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무덤 속에 있던 육체들이 다시 일어나 그 육체의 영혼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선한 일, 즉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을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악한일, 즉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의 육체는 그들의 영혼과 함께 합하여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재림 후에 이루어 질 일
그렇다면 재림 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 날까요?
①죽은 성도가 부활 ...... 재림과 함께 곧 이어지는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생명의 부활을 하는것(살전 4:16)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명의 부활에 이어 악한 자가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하여 일어나는 심판의 부활도 있으나(요 5:28-29)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일차적으로 죽은 성도의 부활과 관련시켜 중점을 둡니다.
②생존 성도의 변형 ..... 죽은 성도가 썪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림 당시 살아있는 성도 역시 주님을 영접하기에 합당한 몸으로 변화하게 됩니다(고전 15:51-52)
③어린양의 혼인 잔치 ..... 이는 열처녀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재림한 그리스도와 믿음을 지킨 성도 간의 기쁨의 연합을 의미합니다(마 25:1-13). 즉 인간의 타락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④성도의 포상 ......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함으로써 그 나라를 확장시켰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뒤이어 의의 면류관을 중심으로 이루어 집니다.
⑤악한 세력의 파멸 ...... 하나님을 대항하던 사단을 결박하여(계 20:1-2) 그 하수인이었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들의 군대를 파멸시키십니다(살후 2:8, 계 19:19-21).
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히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를 방해하는 세력을 승리의 왕께서 멸절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종말론을 마친다. ‘천년왕국’에 대한 공부는 이 시간에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년왕국까지 다루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거니와 초신자들에게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후에 다른 성경 공부시간에 별도로 ‘각 교회의 신학입장에 마추어’ 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이상 종말론에 대한 흐름을 자세히 설명하면 종말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후, 그림을 보면서 간단이 요점 정리하는 형식으로 전개한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그동안 지구상에 수 많은 이단들이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했던 역사를 더듬어 보기로 합시다.
먼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단들에 대하여 소개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알고 있는 이단들에 대하여 이야기가 쏱아질 것이며 또한 많은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왜 이단이며 잘못된 것인가를 정확히 짚어주며 우리는 이런 이단에 빠지지 말것을 결심하도록 하고 마친다 - 토론시간 약 10-20분- )
(토론에 필요한 이단들의 특징을 요점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단 종파의 발생 모체는 기독교회이다. 그들은 반드시 정통 교회를 반격하고 나온다.
2. 이단 종파들의 창시자나 교주, 그리고 조직자들은 10대에 신적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3. 이단 종파들은 성경외에 그들의 정경을 가지고 있든지 성경을 무시한다..
4. 이단 종파들은 교주를 신격화 하고 있다.
5. 이단 종파들은 비성경적이요 비신학적이다.
6. 이단 종파들은 비윤리적이요 반사회적이다.
7. 이단 종파들은 현실 도피주의자 들이다.
자, 한번 복습하고 마치겠습니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9. 심판론
•이끄는 말
지난 시간에는 종말론에 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두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 하였지요? 오늘은 종말에 대하여, 그러니까 예수께서 재림하셨을때에 사람들이 받는 심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공부하시면서 “예수께서 오시면 나는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한번 연구하며 또 심판을 받을때는 어떤 심판을 받는가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님들 가운데 심판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는 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주일날 교회에 않나오고 몰래 낚시하러 가다가 그만 교통 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거봐요, 예배에 빠지고 낚시하러가더니 심판받았어요’ 그랬다 합시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이 맞는 걸가요? 틀린 걸까요?
(틀린것 같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무엇이라고 하여야 합니까? 상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벌받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벌도 여러가지 입니다. 심판도 벌인데..... 어떤 벌입니까?
이때 받는 벌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라고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 머리에 맞았습니다. 머리가 퉁퉁붓더니 급기야 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이 집사님이 자기가 왜 돌멩이에 맞았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성경책을 1장 밖에 읽지 않고서 1권 읽었다고 보고해서 상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아하, 내가 하나님 앞에 거짓말 하였더니 벌 받아서 그렇구나’ 생각하였다면 이 벌도 ‘징계’지요. 하나님을 속인 징계.
그럼 심판은 무엇을 심판(טפשׁמ, 미쉬파트)이라고 합니까?
(1) 판정상의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구원 받을 자인지 멸망받을 자인지 판정을 내리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 4:5)
즉 모든 인간은 죽어 백보좌 앞에 나아가 자기의 행위대로 천국과 지옥에 해당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계20:11-15).
(2)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즉 ‘심판’이라고 하는 의미는 악인에게 형벌을 주어지는 그 자체를 ‘심판’이라고 쓰이기도 합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계 17:1)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요절에서 본 것처럼 심판 그 자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심판 그 자체가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3)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사람이 심판대에 나아가 상을 많이 받을것인지 적게 받을 것인지 판단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심판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는 우리(믿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가가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이상 두 요절은 모두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는 상급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이런 심판은 행복한 심판입니다. 1등이냐, 2등이냐, 3등이냐, 적든 크든 상급받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면 심판의 때는 언제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재림때에 ‘백보좌 심판’ 그 때에 이루어 지는것입니다.
그런데 1번 그린에서 보면 특별한 심판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심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사단)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8-11)
• 여기 ‘책망하시다’는 뜻은 ‘죄를 입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책망’은 ‘심판’(판단) 을 통하여 책망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책망은 죄를 입증하여 주고 또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 마침내 의(義)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을 하실때 한가지 측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또 부정적인 측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까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상급을 주시는것도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상을 줄수 있습니까? 심판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책망할 수 있습니까?
자, 이제껏 심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2-4은 부정적인 심판에 대하여, 5-6은 보편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2. 악인과 죄인의 심판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5)
•여기서 심판은 악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반드시 받게될 형벌을 말합나다. 악인은 자기가 받게될 형벌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인(罪人)은 의인(義人)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것입니다. 여기서의 의인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심판하실때에는 결코 악인이 ,즉 죄인들이 의인들이 모여있는 곳에 들어가지못합니다. 같이 동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죄인과 의인이 같이 동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않는 사람이 같이 교회에 있습니다. 늑대같은 사람도 교회에 있을 수 있고 여우같은 사람도 같이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늑대이고 누가 여우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누가 양의 탈을 쓰고 나왔는지 양이 어떻게 압니까? 알곡과 가라지는 항상 같이 있는법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가라지를 미리뽑을 수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힐수 있을것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마십시오. 반드시 심판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갈라지고 그들이 처할 거소도 달라집니다. 알곡은 천국으로 가라지는 꺼지지않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못하리로다”(시 1:5) 하였습니다.
3.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심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3:37-39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 도다 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23:37-39)
예수께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에게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건만 너희들은 그들을 돌로 치느냐. 암탉이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오음같이 너희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나 있었는지너희들 아느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않는구나 이제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지리라, 멸망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예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남지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본문의 말씀의 내용을 지금말로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희 집에 선지자를 보냈다. 전도인을 보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수차례나 보넸다. 그러나 너희가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욕하고 웃음거리로 대하였다. 보라! 네 집이 황폐하여 지리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그렇게 수없이 보냈지만그들을 능욕하고 때리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아니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마저 결국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70년에 예루살렘성은 로마장군 디토스에 의하여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티도스가 예루살렘성을 무너뜨리고 성 안에 들어가보니 부모가 자식을 삶아먹고 있었고 그 처참함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소련도 보십시오. 기독교를 그렇게 박해하더니 점점 더 황폐하여 가고 있습니다. 중국도 박해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이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국의 경제도 매우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과 국가, 국가와 가정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않는가의 차이는 대단항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 집니다.
4. 무익한 말을 한 자는 심판날에 심문을 받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앞에서는 선지자들을 반대하면 심판을 받되 항폐하리만큼 받는다는 것을 예루살렘 멸망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무익한 말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무익한 말을 하더라도 다 심판하여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익한 말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무익한 말의 예
1) 욕하는 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최고 살인까지 연결될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얼마나 노를 발하였는지 정도는 알 수 없지만 심판을 받게 된다, 그 정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어 상급의 여하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라가’(אקיר, 레카)라 하는 말은 ‘텅빈’이라는 뜻입니다. 요즘말로 바꾸면 ‘골빈놈’ ‘도덕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런 뜻이지요. 그다음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구원도 받지못하고 지옥불에 가게 된다고 하였지요. ‘미련한 놈’이라는 욕이 어떤 말이길래 지옥까지 간다고 하셨을까? 여기 ‘미련한 놈’은 (μωρέ, 모레) ‘모레’라는 말인데 정확히 번역하면 ‘하나님을 반역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욕중의 최고 욕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돌아설 놈’ ‘모레’입니다. 유대인이가장 싫어하는 욕중에 하나가 바로 이 ‘모레’라는 욕입니다. 오늘은 잘 믿지만 ‘모레’만 되면 안믿을 사람, 말되지요?(웃음) 모레,
2) 전도에 방해되는 말
전도를 하다가 상대방이 안받아 들이면 화가나서 “안믿을려면 관둬, 그렇게 따질 바에는 당신은 차라리 안믿게 차라리 낫겠어” “당신 같은 사람은 교회나와도 골치 아픈 사람이야” 이렇게 전도의길을 막아버리는 말을 할때는 그 사람이 받아야 할 상급은 없습니다.
3) 주님 믿는 것을 고의로 감추는 말
잘 믿다가도 간혹 많은 사람 앞에서 공공연히 부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어떤 성도님이 교회갔다 오는데 길에서 이웃 어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인사했지요. “어디갔다 오세요, 교회갔다 오세요?”
“응, 그냥 심심해서” 그러면서 총총 걸음으로 가버리더래요.
이런 사람은 상급이 없지요.
심심해서가 뭡니까? “응, 오늘 교회가서 은혜많이 받아가지고 오는 길이야?”
“은혜가 뭐예요?”
“기쁨과 소망! 해가 반짝반짝 빛나고 은가루가 쏱아지는 것, 그게 은혜야! 애기 엄마도 한번 와봐!”(웃음)
이렇게 전도는 못할 망정
“응, 그냥 심심해서”가 뭡니까? 교회갔다 온다고 누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믿는게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그런 분은 좀더 어려운 고난이 닥아오면 예수님을 부인할 사람입니다.
베드로 좀 보십시오. 어려움과 위기가 닥아오니 ‘나는 예수을 모른다’ 어린 비자 앞에서 3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상급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였던 만큼 그에 대한 상급은 있습니다. 물론 그는 초대 교회의 감독을 지내어 교회에 덕을 세웠기에 그에 해당하는 상급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3번 부인하였기에 상급을 어느정도 잃은것 만큼은 사실입니다.
4) 지도자를 비방하는 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구스여인을 그의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자기 부인이 죽어서 새 부인을 들였는지 살아있는데도 또 부인을 맞아들였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어찌 구스 여인을 취하느냐”(1) 그겁니다.
구스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여자였지요. 피부가 까맣고 입술이 약간 도톰하고 그렇습니다. 애디오피아 여자였습니다. 그랬더니 모세의형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비방합니다.
“어째서 외국 여자를 들여오느냐? 우리나라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비방하는 내면의 숨은 뜻은 무어냐 하면요 자기들의 권력싸움인것 같아요.
그 뒤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지요?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시냐? 우리와도 말씀하시니라” 우리들도 하나님과 대면할 수준이 되었다. 이겁니다. 우리의 능력이 모세의 능력보다 못하지않다. 모세를 질투하는 겁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줍니다. 왜 똑같이 아론과 미리암이 비방하였는데 미리암만 문둥병을 주었는가 봤더니 아마 미리암이 주동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도 혹 잘못할 수 있습니다.
모세보다도 훨씬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뒤에서 비방하지말고 정당하게 지도자 앞에 나와서 말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기도해 보아도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오해 마시고 제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목회자를 믿고 묵묵히 따라주는게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할 말은 이리 저리 생각해 보고 기도해 보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야기 해야 합니다. 왜?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서 일때!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오해한 것도 있을 수도 있고, 정말로 그 성도의 말이 옳으면 목사님도 “아하, 그거 미쳐 몰랐습니다”하고 되돌아 오면 얼마나 이상적이겠습니까? 단 이야기를 할때는 깊이 깊이, 열길 스므길 넘게 기도해 보고 결정하시는 겁니다.
5) 다른 복음을 전하는 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전해아 합니다. 전도할 때라든지 혹 구역예배를 인도할때라든지 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구역예배 끝나고 나서 성도들이 이야기 하는걸 들어보면 다른 복음을 이야기 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별히 화제로 잘 떠오른 것이
누구는 묘자리를 잘못잡았더니 그 후손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지요.
이 이야기가 성경적인 이야기 입니까? 아닙니까?
서울대학 지리학 교수이며 풍수지리 연구가인 최창조(崔昌祚)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조시대에 왕들이 죽으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고의 풍수지리 대가(大家)들이 조선 팔도를 다 돌아다니면서 묘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집안 꼴이어 찌 되었습니까? 아들이 어머니를 범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였으며 이씨 조선이 망한 것은 어찌된 말인가? 80년대 부터 우리나라 지도층 사이에 명당잡기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썼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감옥에 갔고 외한위기까지 일으켜 백성들을 위기에 몰고간 자들의 명당값이 겨우 이거입니까?”
여러분!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만일 묘자리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고민하실것이면 차라리 화장하십시오. 화장하면 고인도 가장 기뻐할 것입니다. 아직 화장한 고인이 꿈에 나타나서 “나 아파서 못살겠다” “추워서 못살겠다” 그런 소리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이장할 필요도 없고 자연보호해서 좋고 ... 그래서 선경 그룹 회장이 유언을 하엿지요. 나 죽으면 화장하라고. 그 말이 그냥 한말이 아니라 큰 철학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묘자리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할 말이 아니고 우리 믿는 크리스챤은 더욱 더 할 말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인생의 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5. 죽은 후에는 심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니리”(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정하신 것이요” 이 말은 아담 범죄 이후에 정해진 법입니다. 범죄 이전에는 영생이 주어진 삶이었지만 범죄 이후 사람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은 대체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것을 종합하여 복습하자면
‘믿는 자는 구원의 심판, 인믿는 자는 지옥의 심판으로 돌아갈 것이다’
‘믿는 사람도 심판을 받는데 좋은 행실을 많이 쌓은 사람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될 것이고 나쁜일만 하다가 예수 믿음으로 그냥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천국에는 오게 되었지만 면류관은 받지못한다’
여러분!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면류관은 왕이 쓰는 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면류관은 몇 종류가 있습니까?
두가지 종류입니다.하나님이 주시는 몉류관, 그리고 사단이 주는 면류관입니다.
1. 하나님이 주는 면류관
(1) 구원의 면류관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누구든지 주는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말합니다.
(2) 시험과 고난을 잘 참는 자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것임이니라”(약 1:12)
욥은 시험을 잘 참았습니다.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복을 누렸습니다.
2. 사단이 주는 면류관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계 12:3)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계 13:1)
사단이 쓰는 면류관은 멸망의 면류관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 주는 멸망의 면류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죄악상의 면류관이 많을 것입니다.
질투의 면류관, 미움의 면류관, 가인이 받았을 살인의 면류관, 이러한 것은 모두 썪을 면류관입니다.
(1) 사단의 면류관을 썪을 면류관이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불신자)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6. 알곡과 쭉정이 가르듯이 심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이말을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예수께서 손에 알곡과 쭉정이를 들고 세상을 깨끗게 하사 일생동안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천국으로 맞아 들이고 쭉정이는 예수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전도해도 받아들이지도 아니한 사람,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하나님 없이 산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이 다소 외롭고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어렵기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우리들이나 매일반 아니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렴고 괴로운지 밤에는 잠못이루고 술과 담배와 마약으로 노름과 유흥으로 괴로움을 스트레스를 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훨씬, 비교도 않될정도로 행복과 평안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혹 우리가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못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우리는 가졌고, 그들리 보지 못한 것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원히 그렇게 살 것 같지만 최후의 승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아님니까? 그분을 믿는 우리가 아닙니까? 최후의 심판을 우리는 믿습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그때에는 우리는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사실, 잊어서는 않될 사실! 나의 형제, 나의 이웃을 쭉정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않될 것입니다.나 혼자만 알곡될 마음 갖지 말고 그들과 동참할 수 있도록 이 복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자, 한번 복습하고 마치겠습니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기도하시겠습니다.
10. 천국론
•이끄는 말
오늘은 조직신학을 공부한지 꼭 10주째 되는 시간입니다. 마지막 시간이기도 합니다.
1과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은 누구신가, 인간은 누구인가, 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구원은어떻게 받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종말은 어떻고 심판은 어떻고 그리고 심판 받으면 않믿는사람은 지옥으로 믿는 사람을 축복의 장소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 물론 우리가 죽으면 어떤 곳인지 다 알게 되겠지만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 만큼은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요즘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니까, 또 환상을 통해서 보니까, 천국에도 아파트가 있더라 ,그래서 어떤 사람은 20평에 살고, 어떤 사람은 100평에 살더라, 천국에도 사는 사람마다 어째 이렇게 차이가 있는가 물어보니 헌금 많이 한 사람은 100평에 살고 헌금 조금한 사람은 20평에 살더라.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단독주택이나 전원 주택에 살고 싶은데, 난 천국가는거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되겠다” 그랬습니다.(웃음)
여러분, 우리가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천국을 아파트에 비유하면 되겠습니가? 그러면 덴마크나 스위스에 살던 사람들은 “천국와서 까깝헤서 어디 살겠나? 어찌 천국이 우리가 살던 지상보다도 더 못하냐? 괜히 왔다” 그럴거 아닙니까?
여러분,
천국이라고 하는 곳을 우리들의 상상으로 생각하고 또 환상을 보고 그래서 어떻게 압니까?
우리들이 하도 천국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할 것같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극히 일부분을 보여주신 기록이 성경에 나옵니다. 한번 찾아봅시다.
1. 새 하늘과 새 땅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하늘과 땅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겁니다. 저는 이 말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천국이 요즘 하늘과 땅하고 똑같거나 비슷하거나 그러면 되겠습니까? 땅도 하늘도 모두 오염된 상태인데 여기서 아무리 좋은 아파트 100평이면 무슨 소용이 있고 1,000평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이 땅과 본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적어도 오염된 하늘, 오염된 땅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천국에 오염된 바다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럴바에는 차라리 없는게 낫지요. 그럼 뭐가 있느냐? 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강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천국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곳이 아니니까, 거의 모든 사람은 지옥가 있을거고 천국은 소수만 가는 곳입니다. 정말로 바다가 있을 지 없을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강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 바다도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에느“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였으니 없다고 믿습니다. 그럼 강은 흘러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는지 천국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 성경의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보는 바다는 다시 있지 않지만 다른 차원의 바다는 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차원의 바다는 매우 깨끗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천국의 땅과 바다는 깨끗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로부터 이 땅의 자연은 엉겅퀴를 내고 오염되기 시작하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천국의 자연은 아담이 죄짓기 전의 그 자연상태, 하나님께서 처음 에덴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탄성을 지를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야, 정말 좋구나, 아하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좋았더라” 하셨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시청각적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제가 벌써 10년전에 부곡 하와이 온천에 갔었었습니다. 야, 거 보니까 대단히 잘해놓았습니다. 저는 그거 보고 느낀 것이 ‘야, 이 정도면 천국 부럽지 않다. 음식값이 좀 비싸고 바가지를 씌워서 그렇지 시설로 봐서는 천국 한쪽 구퉁이 정도는 않되겠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10년전 이야기니까 지금은 오래되서 그동안 보수공사를 잘해왔으면 모를까 않그랬으면 그곳도 지금쯤 천국 화장실정도로 변했을 겁니다.
천국은 어떤가는 몰라도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보수 공사를 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생각해 봅니다.
언덕배기가 무너진 곳이 있으면 축대를 쌓아서 정리하고 민둥산이 있으면 나무도 좀 심고 골프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강산 이제는 까까중 머리 그만 만들고, 어디 그 뿐입니까? 더 이상 강물 바닷물 시커먼 바다 만들지말고 , 우리가 찬송가도 부르지않습나까?
♬ 삼천리반도 금수 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그 금수강산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나님이 우리 금수강산 보시고 얼마나 가슴아파하실까 생각하면 제 가슴도 아픔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지어준 금수강산이 어째 이꼬라지가 되었노? 허리는 동강 잘리고, 금수강산은 쓰레기 강산이 되고”그러실 겁니다.
저는 지금 자연환경 보호 회원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천국가서 깨끗한 곳에 살고 싶어한다면 이 땅에서 깨끗하게 사는 훈련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버릇 개 못준다고 여기서 하던 버릇을 천국가서 또 하면 천국이라한들 어디 남아나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 땅 팽개치고 천국가서 살 생각만 하지 천국가기 전에 훈련받을 생각은 않합니다. 여기서 하는거 보면 지옥가서 살 훈련하는것 같습니다. 지옥은 지금처럼 그렇게 사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예배 끝나면 여기 저기 휴지조각, 껌껍데기, 주보가지고 비행기 접은 것, 심지어 아이들 코풀어 놓은 것까지도 그대로 널려 있을때도 있습니다.
자. 이제 천국가서 사는 훈련도 좀 하시면서 신앙생활 하십시다.
그래서 천국에는 새하늘과 새땅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그리고 기쁨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 여러분,
천국에 대하여 우리가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하지만 그것은 가보지 않고서는 확실히 모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또 한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두번째 그림을 보십시다.
2. 생명나무가 있음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위하여 있더라”(계 22:2)
•두번째 그림에 보니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없어진 생명나무가 여기 있는겁니다. 이거 따벅으면 영생하는겁니다. 아담이 미쳐 생각을 못했지요. 조금만 생각했어도 선악과를 따먹기전에 생명나무를 먼저 따먹는 건데... 그것 보면 죄 짓기 전의 아담은 아주 순수했던것 같습니다. 앞뒤를 그렇게 계산하지 않고 때묻지 않은 마음을 아담과 하와가 소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쫓겨나와서 후회했을 겁니다. “선악과 따먹기 전에 영생나무 부터 먼저 따먹는건데”
하나님이 영생나무를 따먹을까봐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화영검과 그룹을 두어 그 곳을 지키게 합니다. 아무도 못들어 오도록 .....
그런데 그 생명나무가 여기 있는 겁니다.
이 생명나무가 강 좌우에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매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기 “소성하기위하여 있더라” 했는데 ‘소성하다’는 말은 ‘데라퓨오’(Θεραπεύϖ)라고 하는데 ‘고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죄로 말미암아 상한 만국,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한 심령과 육체를 완전케 해주는 치료제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명나무 열매는 먹으면 영생하지만 상한 심령으로 영생하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그 잎사귀로 백성들의 상한 심령까지 말끔히 치료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 따위가 전혀 없는 영생과 축복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겔 47:12이하에 예언되어 있는 이야기 입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 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12)
똑같은 이야기지요. 벌써 에스겔은 약 600년전에 이미 천국에 대한 이상을 본 것입니다. 사도 요한하고 똑같이 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는 또 한가지가 있는데 에덴동산에 있던 강하고 똑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이 여기 있습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여러분,
그렇다면 뭐 느낌이 오는 거 없습니까?
처음 우리가 잃었던 에덴동산과 여기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은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매우 유사합니다.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 나무가 있었는데 천국은 없습니다. 이 말은 이 곳에서는 죄지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혹받을 일도 없고 유혹할 일도 없이 그냥 마냥 좋은 겁니다. 좋은 일이 오래가면 싫증도 날만 한데 천국에서는 좋은 상태로 그냥 영원히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지요.
자 우리가1, 2번의 본문을 통해서 천국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만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 단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상상해 보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정신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정신인가?
3번 그림 요절을 봅시다.
3. 천국의 모습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사 65:25)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정도로 원수가 없을 것이다는 겁니다. 이리는 양을 잡아먹고 사는 존재 입니다. 그리고 사자는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살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 이 땅의 현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는것은 고사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 바로 현실이지요. 사기해먹고 뇌물 받아먹고, 심지어는 인육까지 먹고, 천국은 그게 없다는 거지요. 뇌물 줄 일도 없고 받을 일도 없고 서로 아끼는 곳,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사자가 짚을 먹는다 했지요? 뱀도 흙을 먹고 산다는 겁니다. 결론은 천국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는 겁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며 눈물이 없는 곳,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지옥과 천국엘 가봤답니다. 비유의 이야깁니다. 먼저 천국엘 갔었는데 그 천국은 특별한 천국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팔을 굽히지도 않고 살더랍니다. 팔도 굽히지 않고 어떻게 사나? 밥먹을 때 팔도 굽히지 않고 어떻게 밥을 먹지? 그런데 얼굴을 보니까 밥굼고 사는 것 같지않게 모두 건강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식사시간이 되어서 보니까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먹여주더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친절히 먹여주며 살아가는데 모두 얼굴이 투실 투실! 그 다음에는 지옥엘 가봤답니다. 보니까 거기도 사람들이 팔을 굽히지 않고 사는 지옥인데 전부 보니까 사람들이 살이 빼짝 말랐더래요. 그래서 아하, 지옥에는 밥도 안주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지옥도 식사시간이 있더래요. 그럼 왜 모두 말랐지? 하고 식사하는 것을 보니까 서로 자기것은 자기가 먹으려고 하늘로 음식을 던지고 자기 입으로 받아먹더랍니다. 반 이상은 하늘로 날아가고 그러더랍니다. 이것은 누가 만들어 놓은 천국과 지옥의비유 이야기지만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서로 돕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곳이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천국 가기 전에 미리 연습 많이해서 가십시다.
그런데 천국의 모델 하우스가 이 땅에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천국자체는 아니지만 천국하고 가장 닮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왜 교회가 천국하고 닮았는가? 우리 사도행전 2:42을 찾아봅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1.가르침을 받고 ..... 겸손한 자세로 배우는 거지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배울 수 있습니까? 항상 나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고 배울것이 있으면 겸손히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자세
서로 교제하며 ...... 자기 담을 쌓지 않고 벽을 허물며 집을 개방하며 서로 교제하는 자세
2.떡을 떼면 ...... 이것은 성만찬을 말합니다. 성만찬은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서는 떡을 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기 전에는 항상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3.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항상 깨어서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의 도움을 바라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세 이러한 모든 교회의 자세가 곧 천국인줄 믿습니다.
과연 초대 교회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상 끝)
그런데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갈수 있는가 자격이 잠깐 소개됩니다.
4.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여기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에 대하여 한번 살펴 보기로 합니다.
여기서 내 어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아버지의 뜻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뒤에 나오는 요절이 중요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 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그렇게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셨더니 어떤 사람이 말하길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 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말하면서 자기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도 했으니 자기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놀라지마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실 말씀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병을 고쳤어도 천국을 못간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러겠지요. “주님, 그럼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것, 그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병고친 것은 인정 안해주는 것입니까? ”
“인정한다. 내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내 이름으로 병고치고 한거 다 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이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인줄 모르느냐? 네 권능으로 고친 것이 아니라 내 권능으로 고친것을 모르느냐? 네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네 체면봐서 고쳐준 것이 아니라 난 단지 그 병자가 불쌍해서 고쳐 주었다”
본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여도 내가 단지 너를 도구로 쓴 것 뿐이지 너의 공은 없다. 너는 이적을 행하면서 말로만 나를 주님이라고 불렀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리고 그 신앙고백을 믿고 나를 따르기로 노력하였느냐? 병고치고 능력을 행한 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진실로 믿고 회개하는 모습,그것이 복은의 핵심이다” 본문의 말씀은 이것을 말하려고 하는것이지요. 병 아무리 많이고치고 해봐야 예수 바로 믿지못하면 아무 소용이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병을 많이 고친 현신애 권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신애권사 집회에 가면 병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참 많은 병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지요.
그런데 이 분이 꿈을 꾸었는데 천국에 갔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예수님, 저 왔어요”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그러더랍니다. “아유, 저 모르시겠어요? 신애입니다. 현신애!” “현신애가 누구냐? 나 그런 사람 모른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현신애권사님이 물었답니다. “그럼 한경직목사님 아세요?” 그랬더니 “잘알지” 그러더랍니다. “그럼 조용기 목사 아세요” 그러나까 “조금 알지” 그러드랍니다. “그런데 현신애를 모르세요” “아무래도 모르겠는걸”
그러다가 꿈을 깼답니다. 내가 그 소릴 듣고 참 아깝다 생강이 들었지요. 꿈깨기 직전에 ‘박웅식’목사 아시냐고 물어보나 보지....(모두 웃음)
현신애 권사가 꿈을깨고 나서 큰 걱정을 하게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는데 나를 모른다고 하니.... 이거 꿈이지만 이것이 실제로 닥치면 어쩌나 고민을 하였지요. 그래서 이제껏 환자를 고치면서 통장에 차곡 차곡 모아두었던 배추 잎파리 모두 찾아서 하나님 앞에 헌금했다는 거지요. 일이백만원도 아니고 일이천만원도 아니고 참 귀한 헌금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지요. 저는 생각하길 “그 꿈은 참 잘꾸었다”그럽니다. 그 꿈이 시사하는 바가 큼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거짓 선지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적과 표적을 보이는 선지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선지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우리는 표적과 기사로 미혹하는 자들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병든자가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 병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 병이 사단이 준 것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낫습니다. 그러나 그 병이 죄의 결과로 온 것이면 징계받는다 생각하시고 감당하셔야 합니다. 그러다 징계기간이 끝나면 병은 치료가 될 것이다. 또 기도하시면 그 징계의 기간을 감하여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합심하여 기도하면 기도를 속히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의인의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께 기도를 의뢰하십시오. 분명히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궁굼해하실 겁니다.
“목사님, 우리가 병이 나면 꼭 기도해서 나아야 합니까? 아니면 병원이나 약국에서 약을 사먹으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인가요?”
분명히 말씀드려서 병원가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사의 기술을 사용하시어 환자의 병을 낫게도 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일반은총이라고 하지요.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가지 은총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특별은총인데 성경을특별은총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말슴을 특별은총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일반은총이 있는데 성경을 제외한 모든 자연계, 물질계, 이것을 일반은총이라 하지요. 우리가 밥을 먹고 살아가는것,이것은 일반은총입니다. 밥은 건강을 지켜주는 약입니다. 일반은총이지요.
성경에서 병고치는 방법은 여러가지 입니다.
•음악을 통하여 낫습니다. ......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의 병이 나았습니다.(삼상 16:23)
•포도주를 먹어도 낫습니다.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위장약)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민간치료로 낫습니다....“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왕하 20:7)
•기름을 발라서 낫습니다...“너희 중에 병든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연고류)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학을 통하여 병을 고치더라도 결국은 의술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술(일반은총)에만 의지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은 의술도 의지하고 그 의술의 열쇠를 쥐고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울러 의술과는 상관없이 초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5.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만 들어감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으로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흔히 빠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 본문 말씀을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진하고 깨끗해야 들어간다”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린아이들은 천진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너희들도 이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깨끗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뜻입니까?
그렇다면 모든 어린아이들은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몇살까지가 어린아이이고 몇살 부터가 어른입니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상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고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린이의 나약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임니다. 어린아이들 처럼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하고 그 것을 간절히 소원하는 어린아이들 처럼 오직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도움을 소원하는 자세, 그런 것이 있을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큰 아들 클때에 어찌나 발발거리면서 잘 돌아다니는지. 잘 돌아다니는 것 까지는 좋은데 어찌나 길을 잘 잊어버리는지. 안보였다 하면 없어진겁니다. 한번은 고아원으로 바로 넘어가기 불과 몇분전에 찾아냈습니다. 제 어미가 찾았는데 돌아다니다가 미아보호소에 있더랍니다. 조금만 늦게왔으면 고아원으로 넘어가고 고아원으로 넘어가면 이름도 모르기 때문에 전국 고아원을 다 돌아다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아이 못찾기 십상이라지요. 그런데 이 녀석이 미아보호소에서 그렇게 슬피울며 엄마 나타나길 기다리며 울고 있더라는거지요. 바로 이 자세, 주님만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는 이 애절한 마음, 이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강사의 간증 하나만 들자 :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다가 만난 경험 간증)
6. 천국의 비유(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은 진주입니다. 그런데 진주장사는 좋은 진주를 만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산다고 했습니다. 왜? 이윤이 남기 때문입니다. 수지맞는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진주를 소유함으로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을 하게 될것입니다.
당시의 진주는 큰 부자가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고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는 자기의 모든 것과 이 진주를 바꾼 것입니다. 이 진주는 바로 천국입니다.
나의 권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 나의 명예와 비교할 수 없는 것, 나의 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 우리는 이런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께 미움이 있습니까?
천국을 소유하시기 원하시면 미움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욕심이 있습니까? 천국을 소유하시기 원하시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는데 그 무엇이라고 방해물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라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다.
복습하고 마친다.
① ④ ( ? ) ( ? )
② ⑤ ( ? ) ( ? )
③ ⑥ ( ? ) ( ? ) |
□ 여기까지 수업을 마친 신입성도들에게 주일대예배에 간단한 수료증을 만들어 준다면 강한 의미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구역장들에게 꽃을 준비하여 축하를 해준다면 더욱 귀한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신입성도들에게 다음 공부 프로그램을 제공하여야 한다. 다음 프로그램으로는 “그림으로 보는 사복음서” “R.P.R.성경기억법”도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연속이요 평생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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