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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usic

간추린 Vivaldi 생애와 Bassoon Concerto RV484 비교듣기 영상 2개

by 설렘심목 2013. 9. 27.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어린 시절 기관지천식으로 고생하며 어디서든 부르면 바이올린을 들고 달려가 연주를 해서 가계를 돕던 붉은 머리 비발디, 이발사였으나 바이올린연주솜씨기 뛰어나 놀랍게도 궁정음악단원이 된 아버지에게 음악수업을 받은 그는 25세에 사제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천식으로 숨이 차면 미사를 드리기가 힘들어 나중엔 이런 이유로 미사에 참여하지 않아 눈총을 받기도 하는데 천식으로 인해 안토니오는 사제로서보다 음악가로서의 길에 집념하게 된다. 안토니오는 무려 90여 곡의 오페라, 450여곡의 협주곡(추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는 3대 이상의 악기를 위한 32개의 협주곡을 포함해 독주 바이올린 협주곡 220곡, 바순 협주곡 37곡, 첼로를 위한 협주곡 27곡,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25곡, 오보에 협주곡 11곡, 플루트 협주곡 10곡이 포함), 23곡의 신포니아와 75곡의 독주곡, 12개의 트리오소나타 외에 칸타타,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는데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빨간 머리 때문에 안토니오 대신‘미사 안드리는 빨간머리털 사제’(il prete rossa)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이 붙는다.

 

비발디의 어린 날, 엄격한 수도원생활은 병약한 비발디를 집에서 수도원까지 왕복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결과 집에서 틈틈히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사제가 된 안토니오는 얼마 안 돼 베네치아 소재 피에타 고아원 부속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용이 되었고(1703~1740,37년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에 속해 있는 소녀들은 대부분 고아들이거나 길에 버려진 부랑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조직된 오케스트라는 유럽 최고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발디의 음악은 종종 가볍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 이유는 버려진 고아원의 딸들을 대상으로 만든 곡이었기 때문, 비발디의 음악은 주제의 매력을 기억하기 쉽고, 가벼워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러시아 음악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똑같은 곡을 백번이나 써 갈긴 사람이다." 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의 음악은 바로크음악이 그렇듯이 경쾌하고 리드미컬해서 오늘 날 현대음악에 접목돼 째즈나 팝계열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제로써 비발디는 어땠을까?

당시 이탈리아 희극작가 골도니의 평을 들어보면 "비발디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빵점"이라는 것,

가만히 있을 비발디가 아니었던 비발디는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는 영점"이라는 재미난 대답을 했다.

 

비발디는 심한 천식으로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하나 미사가 시작될 때면 영감이 떠올라 작곡을 하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사제의 기미가 별로 안 보이는 듯한 사제가 아니었던가한다.

 

비발디의 마지막은 모차르트와 비슷한데 비발디 역시 심한 소비로 벌어드린 돈을 다 쓰고, 그의 묘지는 나중에 이장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니, 낭비벽으로 인해 죽은 후 돈이 없어 관도 없이 땅속에 묻혔다는 모차르트와 많이 닮았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음악은 대중으로부터 잊어가는 듯 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바흐가 그의 작품을 편곡한 후로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대의 경쾌한 코드와 맞아 떨어져 클래식애호가와 현대음악인들의 사랑을 두루 받는 인기챠트에서 비발디는 항상 우위를 차지한다. 심지어는 건축물이나 카페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비발디라는 상호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정리 solleim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