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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스크랩] 한국교회 무엇이 부족한가?

by 설렘심목 2010. 1. 9.

한국교회 무엇이 부족한가?

 

서창원 목사





이끄는 말

  총신의 교회선교연구소가 주최로 한 본 세미나에 부족한 사람이 발제를 맡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최근에 한국교회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씨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지로 인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열띤 찬반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본 세미나가 과연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각자의 의견에 옳고 그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 한국 교회, 정말 부족한가? 사실 이 질문은 책 제목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합당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상에 있는 교회 중 완벽한 교회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언제나 부족한 교회였다. 완성된 교회를 향하여 부단히 질주해 가는 미완성교회인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들은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듯이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들을 통해서 바르게 교정되어지며 개혁의 길을 가게 만들뿐이다. 지금 우리의 수고도 온전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에 작은 기여를 줄 뿐이지 완벽한 교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전제해야 한다.

설교 예화 중 종종 언급되는 하나는 온전한 교회를 찾는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질문을 받은 목사는 대답하기를 ‘한 교회가 있기는 한데 자네가 그 교회에 등록을 하는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완전한 교회가 아니 될 걸세’라고 답했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일지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에서는 완벽한 교회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기 위해 애쓰는 작업이 요구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라는 구호를 내세웠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도 그러한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로서 우리 시대의 교회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진단해 보고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변혁을 이루어야 할 것은 철저하게 변혁을 추구하여 주님의 온전하심에 근접해 가는 교회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한국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을 단지 시정 보완하고 손상이 간 부분을 메우는 차원의 개량을 말하고 싶지 않다. 실지로 교회 안팎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보수개선의 정도가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심리학이라든지 마켓팅에 물들어버린 교회 관점에서 본 주제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사실 외관은 그대로 놔두고 속만 개량하는 리모델링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금의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 공항 상태에 빠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만가지 대책을 다 세운다고 해도 백약이 무효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탐욕에 묻혀 기본적인 원칙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현 주소는 학자들이나 의식있는 시민단체들이 주장하는 갖가지 처방을 쓴다고 해도 단순한 땜질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진리를 사랑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본기가 뿌리채 흔들려버린 것이 문제이다.

오직 교회성장이라는 탐욕의 영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리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기본기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사실 몰라서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 알지 못해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 나아가는 자들도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알면서도 원점으로 돌아가 기본기 다지는 일을 하기엔 너무나 멀리 와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누가 그 일에 앞장서서 분골쇄신하겠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본 강좌가 단지 문제제기나 하는 광야의 외침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대적 수술을 통해 문제 해결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단지 논쟁을 위한 논쟁, 학술 사업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신 주님의 심정으로 개혁교회의 올바른 개혁을 위한 포화소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미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과연 시정될 수 있는가? 아니면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질식하고 말 것인가? 그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난 부족한 기독교를 말함에 있어서 옥성호씨의 책 내용이 옳다 그르다의 찬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그 책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반격을 펼치는 자들도 많지만 상당수가 읽고 전적인 동감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감대는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그만큼 한국교회 상태가 평신도가 나서서 지적할 만큼 취약해 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평소에 개혁을 위하여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한 목사로서 나 역시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특히 한국교회 강단의 이탈을 안타까워하며 믿음의 선진들이 물려준 성경적인 정통 개혁주의 강단의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아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한 사람으로서 문제점들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

기독교 심리학 또는 기독교 상담학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기독교 신앙 형성에 미치는 유용한 역할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성경 진리보다 우위를 차지해 가고 있는 교회내의 현실에 대한 옥성호의 문제제기는 목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의 지적처럼 그는 극단적으로 치우친 면이 없지 않으나 악인도 적당한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경 밖에서 얻어지는 지혜로운 것들에 대해서는 도리어 감사하게 받아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기여는 인간이해에 대한 상당한 도움의 손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이나 상담학에 의존되어 있는 교회 현실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신학적 기조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성경만 가지고는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입으로는 쉽게 시인이 안된다고 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대다수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옥성호의 지적처럼 한국교회가 심리학이나 경영학 또는 흥밋거리들로 물들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는 줄기차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쳐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우리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오직 성공’(sola succedo)이라는 기치만 높이 휘날리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 절하며 경외감을 표현한다. 문제는 성공이라는 개념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 강단은 언제서부터인지 ‘성공’과 ‘출세’와 ‘번영’라는 말이 마치 돌판에 새겨져 있듯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소위 ‘번영신학’이 우상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은 개혁교회 교단 내에서도 폭넓게 번져 있다. 본인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옥성호의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심리학적 가설에 불과한 ‘믿고 신념화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목회현장에서 실천하는 비복음적이요 비성경적인 다른 복음이 번영신학이다.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고 자꾸 구상화하면 결국 실현된다는 이 주장은 ‘여리고 작전’과 같은 땅 따먹기에도 동원되고 있다. 그것이 나의 파장에 대한 우주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뉴에이지 사상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가설을 끌어들여 우주의 응답 대신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바꾸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을 소위 구상화 복음 또는 번영신학이라고 한다. 이 뉴에이지적 가설을 이용하여 펼치는 운동을 영어로는 word-faith 운동, name it- claim it 운동 혹은 prosperity gospel로 표기한다. 이것은 결단코 참된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그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좇는 처세학내지 성공학에 지나지 않는다. WORD OF FAITH 운동이나 번영신학은 뉴에이지의 일환이며 다른 복음이다.

이같은 다른 복음이 버젓하게 기복신앙과 맞물려 복음인양 외쳐지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성공이라는 탐욕의 신이 지배하여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너무나 많이 이탈되어 버린 것이다. 세속주의의 성공신화가 진정한 복음으로 둔갑되어 있는 상황에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의 외침은 여전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일이다. 그래도 외쳐야 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상황에 따라 성경을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상황은 진리가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요 현세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불변의 진리이다. 경험도, 상황도, 대중의 흐름도 모두 성경의 잣대로 판단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들으려고도 해서는 안된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곳에서는 우리의 입이 근질근질해도 침묵해야 한다. 성경에 없지만 상황의 편리함이나 유익 때문에 하나 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 결국은 다른 복음이 진짜인 것처럼 활개치고 다니게 만들어 왔다.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환부는 봐줄 대상이 아니다. 과감하게 도려내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좌우에 날선 그 어떤 칼보다 더 예리하여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력을 다해 전파해야 한다.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의 자리에 다시 올려놓아야 한다. 탐욕의 우상숭배를 쪼개버리고 오직 구속한 주님만 바라보게 해야 한다. 지금은 성경 진리보다 성공신화를 이룬 사람들의 말과 방법론이 더 위력을 발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심리학이나 경영학 그리고 사람의 흥미위주의 놀이 문화는 교회를 잠식하고도 남는 독약일 뿐이다. 성경의 권위는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그 무엇보다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누구나 성경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사회법이 더 무게가 있다. 교회 내 수많은 분쟁을 사회법정에 끌고 가 그들의 판정에 굴복하는 것이 성경 진리에 굴복하는 것보다 절대적인 것이다. 지금도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두려움이 없이 사회법에 호소하여 어떻게 하든지 유익을 얻고자 하는 생각들이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진리의 일군이라고 하는 자들이 벌이고 있는 이러한 추태는 고스란히 성도들에게 전염되어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하기보다 덩치 앞에 절하는 자들로 추락시켰다.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병행하는 성경의 충분성(the sufficiency of the Bible)이다. 심리학이나 경영학 및 엔터테인먼트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상적 배경이다. 성공신화주창자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이다. 고난을 택하는 것 보다 실리를 택하는 현실이 월등하게 위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젠 성경을 보완하는 신인협동설과 같은 것을 교회가 대폭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경의 충분성을 말할 때는 세상만사의 모든 일들이나 인간이해의 내면세계에 대한 모든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일, 구원에 이르는 참 지식에 이르는 길은 성경 계시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감에 있어서 성경의 교훈만으로 넉넉하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은 백과사전이 아니다. 성경 안에는 과학적 지식이나 고고학적 지식, 천체우주학적인 지식 및 인간이해에 대한 심리학적 지식도 부분적이나마 존재한다. 경영학적 지식도 있고 수사학적 지식도 있으며 군사학적 전략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근본적으로 주어진 이유는 인간사에 필요한 모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듯이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는 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총체적이고 유일한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다. 심리학이나 경영학이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심리학의 유용성 문제는 인간 심리 현상에 대한 보조 자료에 불과한 것을 마치 성경을 능가하는 진리로 둔갑하여 목회현장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목회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어야 한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성경의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보충하는 재료로 사용할 수는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원수들의 전략까지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합 왕의 사악함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의로우심이 어떠한지를 명백하게 나타내시는 도구가 되었다면 상담학이나 심리학도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다. 문제는 심리학자들의 이론이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간과해 버리는데서 오는 종교적 신념으로 자리잡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옥성호씨는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심리학이나 상담학으로도 얼마든지 죄의 종 노릇하는 인생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영생을 얻게 하는 기독교의 복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일시적인 해방과 평안을 맛보게 할지 몰라도 죄에서 영원히 자유함을 받아 영생의 기쁨과 감격에 젖어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복음 선포 사역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거장들이 한 이론들을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의 진리’라는 논지에 맞추어 설명하려는 것은 로마로 바울을 호송해 가는 알렉산드리아 호를 책임 맞고 있는 백부장 율리오의 입장일 뿐이다. 즉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더라!’ 사도 바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믿었지만 바닷길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심리학이나 상담학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인용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이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전문가들의 말, 그리고 정신질환에 관한 전문가들의 말을 성경 진리보다 더 신뢰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처음엔 그럴지라도 계속해서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결국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말만 남게 되어 있다.

목사들이 기억할 것은 전문가들의 이론이나 주장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이지 결정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 결정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질병들과 심적 고통들 중에는 목사의 목회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적어도 죽은 자를 소생시키며 병든 자를 치료하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슬픔과 근심 중에 있는 자를 기쁘게 하며 부정한 자를 순결케 하며 어둠에 있는 자의 눈을 밝게 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성경의 충족성은 단지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는 일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인간의 모든 삶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세세한 면들은 혹 부족할지 몰라도 능히 성경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고의 길은 널려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삶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지 않는가?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나 약간의 유용한 지식이 될  심리학은 성경에 첨부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과 신학을 통합하고자 하는 무례한 무리들의 행보는 ‘사단적’이라고 지적한 옥성호의 이해는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목사들 자신들이 성경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말에 솔깃하여 한눈을 팔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실 때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마치 심리학이나 상담학이 21세기의 목회의 대안인양 각광을 받고 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본질을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 말하라고 항변한다면 이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고 해도 그와 똑같은 항변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같이 힐책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청교도들의 책 그중에 청교도들이 다룬 영적 침체 문제(오늘날 우울증으로 번역되는 것임)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당시 심리학이나 상담학이라는 말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말씀 하나 가지고 탁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청교도들이야말로 목회 현장에서 말씀의 충분성을 여실히 드러낸 분들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말은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지 상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적 진리, 과학적 진리, 물리적 진리가 다 있다. 모든 진리가 다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성경 진리 외에 다른 상대적 진리도 선포가능하다는 논리로 비약될 수 있다. 그것처럼 위험한 주장은 없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도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진리가 전혀 없는가? 그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험했지 않았는가? 이것을 성경해석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성경을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참고문헌정도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이론에 맞춰 해석하는 일 역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진리를 진리 그대로 풀어 설명하는 강론이 아니라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성경을 도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가 부족한 것은 성경에 대한 믿음과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 그 고백에 따른 신앙실천이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한 교회 개혁은 염원한 일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구원받는 자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자로 세우는 일에 성경진리로만 충분하다는 믿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얼마나 위력있는 것인지를 목회현장에서 체험되어야 한다. 혹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말씀 전파에 충실한 목회였다고 한다면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가 아니라 단지 사람 모으기에 급급하여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고안한 방법들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위력있는 것으로 작용했다는 논리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선포한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불철주야 목회를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하는 동역자들 중 누구도 이와 같은 엄중한 심판을 받지 않게 되기를 갈망한다. 오직 성공에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에 발 벗고 나서라.

2.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진리가 머물러 있을 곳은 교회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믿는 자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진리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심리학 때문에, 경영학 때문에 또는 사람들을 위한 흥밋거리들 때문에 정작 있어야 할 진리가 교회 밖으로 밀려나가고 있다. 참 빛이 자기 세상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및 장로들이 거절한 것처럼 지금은 교회가 도리어 진리를 배척하고 있다. 그 일에 목사와 장로들이 앞장서고 있다. 신학도들이 선호하고 있는 과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원어 연구나 본문 강론에 필요한 성경신학 및 조직신학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지고 교회 성장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다.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자주 등장하는 과목들을 보라. 하나같이 성공적 방법론에 치중한 것들이다. 장로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주된 목표는 교회 사업을 잘해서 적어도 몇 백 명, 몇 천 명, 몇 만 명 모이는 교회(기업)의 임원들 행세하고 싶은 욕망만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들은 권위있고 능력이 있으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선포하여 존귀와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담학적 접근이나 심리학적 지식을 포함하여 청중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마켓팅 전략들을 교묘하게 성경구절들과 섞어 전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즉 신본주의 예배와 경건한 삶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존감을 높이 세워가는 인본주의 예배와 욕구충족에 열광케 한다.

예배도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 수단으로 이용할 뿐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이 없다. 예배에 와서 자신들의 느낌이 좋고 즐거우며 교회 생활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교리야 무슨 상관이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 신앙에 대한 무지와 혼돈 및 불확실성에 빠져 있다. 이런 현실적 상황은 진리에 대한 복종보다 전문 지식인들의 말을 더 신뢰하게 만들고 있다. 얄퍅한 기독교, 무게가 없고 경건의 능력도 떨어지며 단지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들과 몸동작이 난무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고 체계 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자리 잡기 힘들다. 더욱이 소비자가 왕인 마켓팅 전략은 숫자(영업이익)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에 진리는 설자리가 없어진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겠다는 마켓팅 전략을 구사하는 교회는 당장의 필요가 채워질수록 더욱 영적 굶주림에 허덕인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뭔가 더 확실한 것을 찾자 헤매게 될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초자연적 경험을 약속하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지금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인기절정의 방법론들은 이미 신학 기조가 비성경적이고 탈신학적인 신비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이들이 성경을 부정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회와 개인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진리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는 이제 사라진 신학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신학이 교회의 중심축이어야 한다. 신학은 전문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자산이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신학 공부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종교이다.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한다. 그것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지름길이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을 결코 알 수 없음을 지적한다.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 인간 자신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피조물이라기보다 도리어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뒤바꾸어 놓는 것이 된다. 지금 한국교회를 보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버렸는지 분간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전적 타락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신학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선한 마음과 양심이 있다’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결코 미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양심도 부패한 양심일 뿐이다. 그 양심에서 나오는 것은 가장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방식과 무의식 세계 영역을 개발하여 인간의 정신적 보고로서 추앙하고자 하는 심리학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자 하는 아담의 후손이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일 뿐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엡 2:20).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은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지금도 교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교회가 계속해서 나팔을 불어야 할 복음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전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맴도는 신학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심리학에 끼일 여지가 어디 있는가? 심리학의 역할을 굳이 강조한다면크리스천 라이프 스타일로의 변화를 도와 줄뿐이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론과 성령론 및 인죄론과 구원론을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때를 따로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오게 하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교회가 신학을 도외시하면서부터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꼬인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식을 성경 말씀에서 찾지 아니하고 인간의 지혜에서 찾으니 하나님이 필요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선한 마음과 양심이 그 모든 일을 능히 가능케 하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겠는가? 개혁주의 교회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성공실현이라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끄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신학을 변두리로 밀어내는 교훈들, 성경의 무오성과 충족성을 부인하는 교리들, 하나님을 보게 하지 않고 인간의 자존감을 세우기에 급급해 하는 교훈들, 오로지 성공과 출세와 행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거짓된 복음이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은 참 기독교가 아니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시대가 바로 이 때이다. 그럴수록 진리의 일군들은 더욱 진리에 매여야 한다. 진리를 더욱 풍성히 깨닫게 하고 그 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가르침이 아닌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배격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눅 12:15) 교회의 생명은 숫적 우세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함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히 4:12)진리에 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진리가 최종 승자가 될 뿐이다.  

심리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성도의 궁극적인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는 가르침과 대치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죄성을 지닌 인간의 선이란 세상적이요 육체적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에서 온 것이지 위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데 있다는 가르침뿐이다. 자아실현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개발이 안락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행복은 가식에 불과한 것이다. 세속적 가치인 땅에서의 부와 영화란 결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장 부와 영화를 크게 누리며 지혜롭다고 하는 솔로몬 왕조차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했는데 성도들로 하여금 허탄한 것을 좇게 하는 자들은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것인가?  

정원철씨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 상담이 자아실현의 욕구를 넘어 인간이 가진 영적 필요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적 필요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인식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적 설교로도 충분히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이란 ‘영원토록 복되게 사는 예술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도우시는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가르치는 예술이다...실제적인 것 외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란 아무 것도 없다...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실제적이 아닌 이론적으로만 알려진 지식은 하나도 없다.’

사실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것이 다 죄와 연관이 있다. 죄의 뿌리가 뻗어낸 가지들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해답이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선언했다. 죄인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자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그리스도만을 전파해야 한다. 모든 성경이 다 그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론이 아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를 말해야 한다. 신학을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더욱 풍성한 삶을 얻게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경험이 어떠하든, 인간의 이성적 판단 능력이 어떠하든, 꿈이나 환상이 어떠하든 개인의 느낌과 생각이 어떠하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능가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가르침과 사상은 계시의 말씀에 매일 때 제 가치가 있다.    

3.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오늘 한국교회의 부족한 모습은 교회 본질에서도 발견된다. 어쩌면 교회관의 상실이 큰 혼란을 키워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성장제일주의로 치닫고 소위 성공한 목회자와 그 교회에 소속된 자들의 성공담이 위력이 있을 뿐 성경의 권위는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교회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그 터로 여긴다. 그 터가 아닌 것은 가짜이다. 그 터 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한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미완성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승천하실 때 선물을 안겨주셨다. 그 선물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및 목사와 교사들이다(엡 4:11). 이들의 주된 역할이 무엇인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2절).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도구는 성경말씀뿐이다.

교회관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부족한 것은 교회의 순결성과 거룩성이다. 개혁주의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겨온 것이 회원자격(membership)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등록하면 일단 개 교회 성도라고 말한다. 정회원에 대한 엄격한 심사가 없다. 더구나 교회가 문턱을 낮춰서 지역주민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게 한다는 맹랑한 논리는 거룩성을 상실하게 했다. 교회는 누구나 와서 노는 곳이 되었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통의 현장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반드시 들어야 할 메시지는 없고 그들이 듣고 싶은 메시지만 난무하게 되었다. 그러니 학습과 세례식도 형식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교회 출석 여부와 헌금생활이나 봉사활동을 점검할 뿐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변화된 삶을 진단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 세속주의가 배이게 된 것이다. 어느 모임이든 회원의 헌신 여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듯이 교회 역시 교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생명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임을 삶의 현장에서도 담대하게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헌신이 교회의 힘이 무엇인지를 세상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순결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길,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한 자기진담을 통해서 일어난다. 문제는 그러한 진단보다 자아실현과 행복과 부와 영화를 추구하는 성공의 비결에 초점을 맞추는 메시지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강단에서 성경 진리가 선포되지 않을 때 성도들은 자기를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도리어 자기의 삶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괜찮은 존재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기체로서의 몸의 특성은 양식 섭취가 되지 않으면 기능을 상실한다. 즉 버려져야 할 시체가 될 뿐이다. 반드시 먹어야 몸의 각 지체들이 제 역할을 감당한다. 따라서 교회에 주신 선물들인 ‘그 사람들’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말씀으로 주님의 기르시는 양들을 먹이며 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의 삼대표지 중 그 첫째가 하나님 말씀 선포요 둘째는 올바른 성례 거행이며 셋째는 권징시행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선포와 가르침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성례거행과 권징시행이 없어도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필수적으로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올려져서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제 기능을 잘 감당하고 있어 핍박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 때문이다. 즉 교회로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데서 일어난 일이다.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완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교회를 핍박할 때는 적어도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었을 때였다.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시대, 청교도 시대, 대각성 시대 등 그 기간은 짧았을지라도 교회로서의 제 역할 분담은 잘 되었었다. 성도로서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갔다. 그러나 지금은 처세술에 능한 교인들을 늘어남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들은 드물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짜 교회인양 오해하고 산다. 자신들이 만든 교회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 확립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놀라운 신분의 사람으로 칭해지는 것이다. 사실 그런 신분의 사람이 되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풀어 설명하는 강론 사역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자아실현이나 행복을 꿈꾸는 상담학이나 심리학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이나 상담학자들은 그들의 심리치료나 상담을 통한 관계회복에 놀라운 결과를 얻은 사례들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도들의 간증이나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성경이다.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것을 보라. 그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상에서 경험한 것을 말했다. 그가 직접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을 들었고 눈으로 확인한 바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절).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은 더구나 내가 그렇게 경험한 것이다 고로 믿으라’고 설교한다. 먼저 성경 진리를 말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그 진리가 참인 것을 뒷받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체험을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했다. 즉 그것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곧 성경이다.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경험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말씀을 공급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온전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들의 영혼의 태양이여 바위이며 생명이요 떡인 고귀한 분이시다. 이 세상이나 영원한 세계에서도 그리스도는 흠모할 만하며 유익하며 선한 모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 빛, 능력, 성장, 이 땅에서의 위안 및 기쁨들이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구원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의 가장 절친한 교제 속으로 인도되며 가장 확고한 연합을 가지며 가장 거룩한 교통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영적 감흥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만 맛볼 수 있는 영적인 힘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부족한 면은 금보다 더 귀한 이 진리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경험위에 교회를 세워가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성공은 곧 진리라는 등식을 만들어 장차 오는 세상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현존하는 세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우리의 경험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예언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따라 세워져 간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장차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킨 죄를 회개하고 말씀의 일군들을 존귀한 자로 여겨야 한다. 그것이 사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부름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사람들의 일군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일군인지 날마다 확증해야 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수고로 얻은 분복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물거품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추앙받는 성공은 하나님 앞에서 음부로 추락하게 하는 거치는 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에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심리학이나 경영학에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줄 모르면서 상담을 잘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교회 운영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는 청교도들의 견해에 따르면 설교자가 아니다. 물론 개혁교회 목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나는 여전히 말씀에 능통한 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요 둘째는 목양하는 양들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후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심리학이나 상담학 및 경영학의 교훈들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이지 결정사항이 아니다.

사실 심리학과 신학을 통합하고자 하는 자들은 매우 위험한 자들이다. 통합이란 양측이 다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이 성경 진리의 종합적인 체계인 신학과 동일 선상에 있는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계시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반 은총 영역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의 글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김주원씨가 이렇게 지적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다면 왜 사람들은 거기에 인간의 지혜를 첨가하려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우리의 삶과 죄의 문제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하여 자꾸 자신들로 모르는 지혜나 철학을 첨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 답은 의의로 단순하고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학과 신학의 통합을 꿈꾸는 자들은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순절주의의 성령의 직통계시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범죄 행위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해 준 말씀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의 본질은 신앙공동체이지 사회사업 혹은 문화사업 공동체가 아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 본질적인 사명을 망각하고 부스러기 작업에 몰두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교회 본연의 모습에서 이탈되지 않는 것이다. 사회사업이나 문화 사업을 한다고 해서 복은 선포를 통한 회심과 같은 동일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가? 아니다. 교회에 대한 반감은 줄일지 몰라도 복음에 대한 굴복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다. 교회는 유람선도 아니다. 교회는 구조선이다. 구원의 방주이다. 죄인들이 와서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어 천성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가 될 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진리조차 외면하고 세상을 품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모습은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조롱의 대상이 되게 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하나는 성도의 교제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도간의 교제는 동우회와 같은 친목단체로서의 교제가 아니다.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같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신령한 교제여야 한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섬김으로 나아가야 할 교제가 사교적 모임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있다. 교회 내에서도 하나 됨보다 교육이나 가진 재산의 유무에 따라 혹은 취미생활에 따라 분리되는 모임들은 사적 모임은 가능해도 교회 공동체의 교제모임으로 볼 수 없다. 사교를 위한 모임은 언제나 자신들의 욕구충족을 위한 것이 전제된다. 사업상 유익을 얻을 수 있고, 인간관계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출발점이다. 거기에 기도나 말씀은 요식행위일 뿐이지 하늘의 것을 공급받아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주님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가기 위한 영적 전투를 위한 강력한 무기를 갈고 닦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이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할 자들이 도리어 세상적 잣대로 인한 분리를 추구하는 친교는 마켓팅에 물들어가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특별한 그룹을 관리하듯 교회가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드리기 위한 분리정책을 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받은 은사에 따른 구분은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직업이나 취미나 지식의 여부에 따른 교제는 세상의 빛이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도리어 약하고 천대받고 지혜없는 자들이 더 많은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씀이 교회의 모든 모임을 지배해야 하며 땅엣 것을 벗어버리고 위엣 것을 덧입기 위한 영적 싸움에 더욱 치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은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주셨다. 사람들은 기도조차도 자기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은혜의 수단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구하라는 명령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적인 욕구를 버리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밤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라. 무엇 때문에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는가? 물론 그가 잠시 후에 받게 될 잔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져야 할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하여 마치 우리가 악몽을 꾸고 났을 때 온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젖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니다. 그의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한”것은 육신의 몸을 지닌 인간적인 욕구를 꺾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는 노동이다. 노동의 대가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출세를 위해서 기도한다.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와 건강과 부와 행복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정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욕을 먹고 있는 것을 분개하며 땅에서 의인들이 사라지고 경건한 자들이 끊어지고 있는 것을 인한 탄식과 애통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욕구충족과 자아발전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엎드리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출세와 성공과 장수와 건강을 위한 기도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덤으로 주는 후식에 불과한 것이지 주식은 아니다. 사은품 때문에 백화점에 가는 이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시장에 간다. 물건을 사다보니 덤으로 사은품을 주는 것이다. 성도의 지속적인 관심은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다.  
  
나가는 말

한국 교회, 과연 부족한가? 그렇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부족하다.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 잣대는 세상의 흐름이나 문화적 욕구가 아니다. 예배 갱신이든 교회 개혁이든 그 모든 표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기록된 성경 밖을 넘어가지 말라’는 교훈은 바울 시대나 과거 농업중심 사회에서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골동품으로 여기는 그 계시로부터 여전히 이 시대를 빛낼 새것이 등장한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인내하며 말씀의 구현을 추구해야 한다. 더 이상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심장에 새겨진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고로 성경만이 교회가 믿고 가르쳐야 할 법이다. 심리학이나 경영학이나 오락을 첨가시켜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는 심리학자가 아니다. 경영의 귀재들이 아니다.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일에 탁월한 자들이 아니다. 오직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뿐이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성경을 선물로 주셨다. 이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강론하는 목사의 책임이 강단에서 굳건하게 들어나야 한다. 말씀 선포사역을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신학이 실종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바른 교리를 견고히 심어야 한다. 교회의 터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행하며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성도여야 한다. 더욱 주님을 닮은 사람들을 만드는 수단은 말씀 선포 사역 외엔 없는 것이다. 이 일이 제대로만 실현된다면 교회의 부족한 면들은 점진적으로 온전한 교회를 향해 변모해 갈 것이다. 소비자 위주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교회, 세속적 가치와 흐름이 주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진리가 이끄는 교회, 인간의 얄퍅한 지혜를 필요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존 번연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말씀의 피였던 것’처럼 말씀의 피만 흐르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인간들의 유희는 날려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있는 영광이 드러나는

출처 : 나눔과섬김
글쓴이 : mat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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