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25 03:03 | 수정 : 2013.04.25 12:00
[클릭! 취재 인사이드] “이데올로기는 다 쓰잘데기 없는 것”
북한 김정남의 외삼촌 성일기씨가 증언하는 남북한의 80년
‘강남 좌파’, ‘캐비어 좌파’들이 꼭 만나 얘기해야 할 사람 1호는?
“잘 생기긴 뭐가 잘생겨? 이젠 병신이 되어 버려서…”
그에게 “잘 생기셨다. 젊어서는 더 좋으셨겠다” 했더니 그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호탕하게 농담을 잘하는 양반이었습니다.
이달 23일 오후 TV조선 시사토크판 녹화 현장. ‘김정남(북한 김정일의 장남)의 외삼촌’인 성일기(80)씨는 몸 오른 쪽에 풍을 맞아, 오른손이 마비되고 보행도 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붉은 스웨터를 입은 이 노인의 얼굴은 선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양반의 언어는 간명합니다. 자진월북한 남로당원의 아들이었던 성씨는 “‘이상향(理想鄕)’ 북한에 도착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왜 이런 데를 오자고 했느냐 따지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남(南)에서 넘어간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서 그런 말 같은 건 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에 비하면 독일 게슈타포는 이도 안났어!” ‘이도 안났다’는 표현은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얘기입니다. 당시 북한에서 남쪽 출신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은 ‘이도 안났다’는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됐습니다.
성일기씨는 우리에게 꽤나 의미있는 두 사람의 외삼촌입니다. 마카오를 중심으로 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김정남(42), 그리고 1982년 한국으로 망명했다가 97년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암살당한 이한영 두 사람이 모두 그 누이들의 아들입니다. 3남매 중 맏이가 성일기, 둘째가 딸 성혜랑, 막내가 성혜림입니다. 김정남은 성혜림(1937~2002)의 아들, 그리고 이한영은 성혜랑(78)의 아들입니다.
성일기씨는 경남 창녕군 성씨 만석꾼 집에서 4대 독자(獨子)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만석꾼 집안에서 왜 월북을 했나”하고 최희준 앵커가 물었습니다. 성씨는 “만석꾼은 아니다. 소출이 만석은 조금 안됐다”고 답합니다. 그저 부자를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만석꾼’이란 수식을 그는 진짜 ‘재산을 측량하는 단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지주집안의 장남다운 말이었습니다.
‘대유행병(病)’에 걸린 꼬뮤니스트 가족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남로당 간부였습니다. 부모는 앞서 월북했고,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성일기씨 역시 1949년 2월 16일 부친의 절친한 친구인 이강국의 권유로 월북했다고 합니다.
해방공간에서 많은 자생적 ‘꼬뮤니스트(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이 ‘수입산 이데올로기’에 유혹당한 사람들은 주로 지식인층이었습니다. 당시 지식인이란 동시에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강남 좌파’ 같은 것이지요.
그래도 여기서 아쉬울 것 없는 집안이 왜 단체로 월북을 했는가 물었을 때, 그는 짧고 시니컬하게 답했습니다. “유행이었지.”
“거기에 ‘이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유행처럼 퍼졌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그 잔영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 1930년대 미국발 대공황은 서구에서 많은 자생적 코뮤니스트를 만들어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의 이런 흐름은 해방 공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막강한 여진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넘어간 북한에서의 삶을 그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고 핍박받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많은 것을 버리고 월북했지만, 정작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로당 출신은 ‘정치적 쓰임새를 다한 전향한 부르조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박헌영의 예가 그렇습니다.
성일기씨는 이후, “산에서 소금국 먹고 버티는 훈련이 고작”이었던 빨치산 교육을 3개월 받고 남파 됩니다. 6.25 직전, 그는 동해안으로 투입돼 울진-영덕으로 이어지는 동부라인에서 맹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그를 잡은 것은 이름도 유명한 김창용 특무부대장입니다. 일제시대 경찰을 지내다 해방 후 또 다시 경찰 수뇌가 된 그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바로 그 김창용은 창녕의 소문난 집안 장손을 알아보고 어찌된 일인지 “이 애 만은 살려주자”고 했답니다.
갑작스런 호의로 목숨을 건진 성씨는 서울로 올라와 단국대 영문과와 성균관대 사학과를 다녔습니다. “등록금 낼 때가 되면 딱 그만큼씩 (창녕의) 땅을 팔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남쪽 사람으로 환원됐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맛본 그가 다시 고향땅에 정착한 것은 4년만이었습니다.
한반도 현대사의 압축판인 성일기 가족
성일기씨는 여동생들의 이야기를 할 때 꽤나 담담했습니다. 목이 메여 한다거나,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살붙이, 피붙이로서 함께 산 시간보다는 그들을 ‘뉴스’와 ‘정보’ 속 인물로 대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 겁니다.
중학교 때 헤어진 여동생 성혜림을 만난 적이 없고, 그저 통화만 했다네요. “서울로 가서 살자”는 오라비의 말에 성혜림은 “정남이는 내가 모스크바에 있는 줄 아는데, 그 애가 언젠가 나를 여기로 찾으러 왔는데 내가 여기 없으면 어떡하느냐”며 모스크바를 떠날 수 없다고 얘기했다 합니다.
- 김정일의 정부(情婦) 성혜림
지금 프랑스 파리에 망명해 살고 있는 동생 성혜랑도 모스크바에서 성혜림과 있을 때 한번 만났을 뿐,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일기씨는 조카인 이한영과 만났을 때의 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성격이 적극적이었던 이한영에게 “너무 까불고 다니지 말라”고 외삼촌이 조언하자, 그는 “메뚜기도 한 철이다”라고 맞받았다는 겁니다.
그가 암살당한 후, 성일기씨는 동생 혜랑을 모스크바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동생은 “한국에서 한 짓”이라고 믿고 있었더랍니다. “이 바보야, 너를 유인하려고 해도 아들이 살아있어야 너를 유인할텐데, 한국이 왜 그 아이를 죽이겠느냐.” 그제서야 성혜랑은 사태를 짐작했다고 합니다.
“이념? 다 쓰잘데기 없는 것”
그에게 대체 ‘이념’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다 쓰잘데기 없는 것. 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두번 말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가족을 분해하고, 삶을 분해하는 경우를 우리는 꽤 여러번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씨 가족의 경우처럼, 이렇게 3대에 걸쳐 수난이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부모의 ‘사상적 허영(虛榮)’은 멀쩡한 아들을 빨치산으로, 어여쁜 딸을 권력자의 정부로 만들었고, 그 자식의 자식들은 유랑하거나 암살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 수난의 가운데서 사건을 목격한 성일기 씨야말로 ‘사상의 쓰잘데기 없음’을 실증으로, 온 몸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부모의 산소를 가보고 싶다거나, 여동생을 보고 싶다거나, 창녕에서 살던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할 줄 알았습니다.
“남자라면 죽음 앞에 떳떳해야 하는데 그건 어려울 것 같다. 이제는 그저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게 소원이다.”
이 양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허무로 덮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화를 마치고 성씨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가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고 하시더군요. 저 역시 그를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그에게 더 물을 것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기회가 생긴다면, 질문자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합니다. 이른바 ‘리무진 리버럴’ ‘캐비어 좌파’ ‘강단 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이 양반과 한번쯤 깊은 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들은 원치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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