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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추억

나찌만행과 소련 빨치산의 처형

by 설렘심목 2010. 1. 6.

나찌만행과 소련 빨치산의 처형

동료 여성의 밀고로 나치에게 잡혀 
"파르티잔에 동조한 죄로 죽는다 " 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파르티잔에 동조한죄로 교수형을 당하는
형장으로 끌려가는17살 나이에 '마샤 브루스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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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소련침공에의한 그들의 유태인 말살적 인종정책으로 인하여,
마샤 브루스키나는 유태인이었던 입장에 독일군에의해
자기어머니와 같이 유태인거주지역 게토로 격리수용되었다.

지긋지긋한 나치만행에 17세의 마샤 브루스키나는 결국, 열렬한 공산주의자가되었다.
그리하여 독일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활동을시작하게 된다.
민스크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다친 소련군환자를 도와 가짜신분증을 만들어주고 탈출을 도왔다.

이것을 눈치챈 어느 여성환자의 밀고로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마샤는 독일 707보병사단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뒤에도
동료를 발설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여성빨치산의 활동에 독일보병사단의 장교는
다른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 본보기로 사형을시킨다.
마샤 브루스키나의 교수형 장면 사진 ......

이 유명한 한컷의 사진은 2차대전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진중의 하나가 되었다.
-= IMAGE 5 =-



만행을 비웃는 또 한명의 희생자가  교수되고 있다

-= IMAGE 3 =-



소련에 이용당하여 빨치산활동을 하다죽는다 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달게하고
독일군은 교수형을시키지만 정작 이사진은 스탈린의 소련정부가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 민간인에 대해서 빨치산으로의 봉기조성과
독일항전에의 정치적목적으로 대대적으로 써먹는 선전용사진이되었다.

러시아의 여성빨치산중 독일군에게 잡혀 강간당하고 유방이 칼에 잘려나간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사진과 더불어,마샤 브루스키나 옆에 웃는듯 목매이는
볼로디아의 사진은 독소전쟁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유명한사진중의 하나이다.

그외의 사진들은 소련군과 교전중 사망한독일군장교의 수첩소지품에서 나온것들로서
잔혹했던 나찌스의 빨치산 처형모습을 볼수있는 대표적사진들이다.


1941년10월26일 의 소련 빨치산의 처형사진-
마샤 브루스키나[17세],볼로디아[16세]. 키릴 트루스[남자]

-= IMAGE 2 =-




조야 코스모데미얀 스카야의 유방이잘려나간 시체를 그려 정치적선전을 한 소련군의 포스터

-= IMAGE 1 =-



독일군1명이 당하면 프랑스에서는10 배의인명을 앙갚음으로사살시켰다.
소련에서는20 배의 보복처형을 했었다.
결과적으로 해방이 되었던양,독일군을 처음 환호하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스탈린제국의 붉은군대보다 더위험한 악랄한 인종집단임을 곧 깨닫는다.

이러한 잔학한 인종정책으로 독일군은 점령지사방에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적군을심는 역할을하여 일선에서 멀어진 후방사이에 광활한 러시아 곳곳의 숲속에서,
쉴새없이 악착같은 소련빨치산들의 습격을받았다.
독일군은 소련정규군보다 더골치아픈 독일군의 목숨을노리는 소련빨치산들과의
끊임없는 2중고의 피해를입고 끔찍한 쌍방의 살륙전을 반복해야만 했다.


1942년10월 14일 우크라이나  미조크(Mizoch) 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학살한 독일군의 만행



1941년 동부유럽의 국가들은
점령군 독일의 또다른 세력인 악명높은 나치의 비밀경찰 ,
게슈타포에게 가혹하고 처절한 인종범죄를 당해야했다.

점령지의 유태인들은 모조리 색출되어 격리되었으며
노동력 제공이 가능한 젊은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살 당했다.
또한 독소전에서 잡혀온 러시아의 전쟁포로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젊은 노동인력을 대거 독일의 군수품공장에
사역 목적으로 강제로 차출되어 독일 각지로 송출되었다.

벨라루시에서는  민스크 게토가 제일 대표적인 유태인집단 격리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저항이 없었던 폴란드 게토와는 달리   
유태인들을 격리후 곧바로 유태인들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독일군은 1941년 8월 보름기간동안 이곳에서 5000여명의 유태인들을 학살시켰다.

독일군은 민스크에서 파르티잔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간인들도
전시 파르티잔 동조 본보기로 대단위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으로 반감을 가진 벨라루시인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파르티잔에 가담하게된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3년기간동안 벨라루시가 소련군에 해방이되기전까지
약 50여만명의 벨로루시인이
파르티잔에 가담하여 철로폭파와 후방교란의 게릴라전으로 활약했다.

벨라루시의 파르티잔들은 1412일 동안 독일군을 상대하여 벌였던 전투로 
독일군 11128명을 사살시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잘 알려져있는 악명높은 나치독일의 
유태인 집단학살의 사례는 1942년 10월14일에 자행된  Mizoch 에서의
유태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대량학살한 사건이었다.




1944년 민스크의 해방을위해 독일군과 싸운 벨로루시 여성 파르티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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