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것들
목회와 신학 2012년 11월호
“나름대로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 왜 열매가 잘 맺혀지지 않는 걸까요?”, “전도를 매주 나가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워요. 쳐다보지도 않고, 시간도 내주지 않아요. 도대체 전도는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나요?” 교회를 방문하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노력하고 실천한 만큼 열매가 잘 맺혀지지 않기에 털어 놓는 푸념들이다. 이런 푸념을 하는 사람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답답한 현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탁월한 방법과 프로그램, 그리고 기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되묻고 싶은 질문들이 있다. ‘정말 전도는 어려운 걸까?’, ‘정말 새로운 방법과 프로그램만 있으면 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열심히 전도하고 노력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다면, 방법의 문제보다도 전도의 본질적인 문제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전도의 실천을 먼저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들은 필자가 오늘날 전도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들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바탕으로 전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해서 전도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드는 교회의 내적·외적 요인들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전도를 어렵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인들은 크게 ‘교회 내적 요인’과 ‘교회 외적 요인’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교회 외적 요인보다 교회 내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회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전도는 활발하게 진행됐고 그 열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맺혔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바로 초대교회의 시기다. 이것은 교회 외적 요인들도 물론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지만, 교회가 내부적으로 단단하게 잘 준비돼 있다면 외부적인 요소들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교회의 내적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전도의 문을 막는 ‘교회 내적 요인’
1. 전도의 도구화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교회의 내적 요인들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전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해야 한다. 어떠한 실천적 행동들이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평가하고자 한다면, 일단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나 원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는다면, 방법과 수단부터 고치고 새롭게 하기보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본질’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 먼저 점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파생돼 나온 것들이 바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본질과 동떨어진 행위를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분명 그 행동들은 어렵고 힘들며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전도학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자신의 저서 《현대전도학》(기독교문서선교회, 1994)에서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내린 전도에 대한 정의가 가장 포괄적이며 넓은 찬성을 얻는 정의라고 말했다. 윌리엄 템플은 “전도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며, 또한 그를 교회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마이클 그린은 이 정의를 풀어서 다음과 같이 전도를 설명했다. “첫째, 전도는 선교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전도가 선교에 포함되는 것으로 선교가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 둘째, 전도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셋째, 전도는 성부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넷째, 전도는 그 효과를 완전히 성령님께 의지합니다. 다섯째,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의 통합을 의미합니다. 여섯째, 전도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일곱째, 참된 전도는 선포나 결단에서 끝나지 않고 제자 삼음에서 끝납니다.”
이러한 정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전도의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돼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첫째, ‘전도는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방법이며 행사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의 정의에 비춰보면, 이것이 얼마나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전도에 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다. 물론 교회의 자리를 채워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전도를 한다면 전도는 하나의 행사로, 그리고 사업으로 전락할 것이며 교인들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
둘째, ‘전도는 교회를 홍보하는 선전이다’라는 것도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오해 중 하나다. 전도는 인위적인 선전과 홍보를 하는 일이 아니다. 전도를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시고 힘을 주시며 이끌어가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렇기에 전도는 선전이나 홍보로 끝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전도가 지속된다면, 동력을 잃어버려 지속적인 전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셋째, ‘교회 다니면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도한다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전해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기에 준비도 필요하고, 생명에 관한 경험도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전도는 예수의 생명을 경험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전도를 독려하기 전에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고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불타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넷째, ‘전도는 교회 부흥의 수단과 방법이다’라고 많이들 오해한다. 만약 이렇게 전도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된 전도는 교회의 존재 의미를 약화시키며 전도를 실천하는 성도들을 지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할 수 있는 힘과 동기를 부여받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바꿔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도를 통한 부흥과 성장은 전도 결과의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 ‘보이는 열매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도를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끼게 된다.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전도를 잘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도자의 기본자세이기는 하나, 일방적으로 열매만을 강조하고 과정은 무시한 채 열매만으로 전도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이러한 오해가 지속된다면, 전도자들은 열매로 자신을 평가받게 되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전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2. 번영의 신학과 지도자의 타락
교회 안에서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슬며시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잘못된 번영의 신학이다.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며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본질이 상실되게 된다. 이것은 전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전도는 기독교 본질의 문제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끌어오는 것이전도가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적 문제인 복음을 전해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일이 전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생기거나 그로 인해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는 힘들고 어려워지며 급기야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전도는 교회의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인 예수의 생명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면, 전도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전도의 행위는 있어도 그것은 생명을 얻는 일보다는 하나의 행사나 사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에서 번영의 신학은 샤머니즘에 근원을 둔 기복신앙에 편승해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를 물질 지상주의로 이끌어가고 있다. 교회도 기업처럼 성장을 추구하는데,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그 영혼을 생명으로 세워가는 복음의 본질적인 의미는 퇴색돼 가고 있는 실정이다. 본질이 퇴색돼 갈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십자가’라는 중심 주제가 잊혀져 가기에 희생과 헌신보다는 자신의 안일에 초점이 맞춰지며,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책임과 사명도 망각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이단과 사이비들이 판치는 형국을 만들게 된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복음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교회의 모습이 처한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 상실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영향력이 퇴색되면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지만, 이와 관련해 전도의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온도가 너무 높다. 다른 종교와 비교한다는 것이 창피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실제로 불교는 가끔씩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들 덕분에 자연성장을 이루기도 한다. 얼마 전 ‘무소유’의 개념을 실천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난 법정이라는 분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불교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다. 천주교 역시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와 <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진 이태석 신부의 모습이 알려지면서 좋은 이미지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지 못한 삶을 실천하며 살고 고귀한 삶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세상의 요구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거룩한 삶의 모습을 잃어가며 오히려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추태(醜態)와 구태(舊態)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연루되고 있으며, 세습의 문제와 돈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는 추악한 꼴을 세상에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볼 때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전도의 현장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는가? 이러한 현실은 전도 현장에서 피전도자들과의 접촉의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전도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세상은 교회와 지도자들을 향해 조롱한다. “당신들이나 잘 사시오! 누가 누구를 전도해야 하겠소!”라고.
지도자들의 삶의 모습에서 거룩이 사라져가니, 자연히 교인들의 삶에서도 거룩한 삶이 빛을 잃어간다. 그래서 더욱 전도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전도라는 것은 당장의 실천적 행위를 위해 현장에 나아갈 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삶으로써 이미 전도를 실천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잔선언에 나타나 있는 ‘현존의 전도’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삶의 전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돼야 전도자들이 세상과 쉽게 접촉점을 가지고 복음 선포의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는 점차 현존의 전도를 잃어가고 있다. 삶의 전도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 중심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다. 만약 기독교 지도자들이 두드러지게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 아무런 잡음이라도 내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도의 문을 막는 ‘교회 외적 요인’
1. 무신론 문화와 스포츠 연예 문화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 가운데는 교회 외적 요소들이 있다.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교회가 전도를 위해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잘 준비해 건강하다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효율적인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사회적·문화적·경제적인 차원에서 전도와 관련돼 전도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요소들을 찾아 제시하려 한다.
현대 사회를 정의하는 말 가운데 ‘무신론적 지성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세속화의 진전을 통해 현대 지식인들에게 나타나는 종교적인 성격을 일컫는 말이다. 종교 사회학자 윌슨(Bryan Wilson)은 현대 사회의 특징에 대해 세속화의 진전으로 우리 사회는 도덕에 기반을 둔 인간 공동체에서 합리성에 근거한 조직사회로 변화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존립의 근거를 제시하고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동력을 제공하던 종교의 문화유지기능을 잃게 됐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속화 끝에 서 있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성을 상실하고 증명 가능한 사실만을 진리로 인정하려고 하는 무신론적 사고가 팽배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현대 지식인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사회지도층의 무신론적 태도는 결국 사회정신의 무신론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도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해주는 데 있어 접촉점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전도는 어렵고 힘들다는 인식이 퍼지게 하는 데 일조했다. 접촉점을 찾기 힘든 전도는 일방적인 선포로 끝날 수 있고,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도를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관련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반기독교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명 ‘안티기독교’ 세력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기독교의 폐해가 너무나 심각하기에 더 이상 사람들이 이러한 피해를 겪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시민운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허구성의 성경,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교, 거대한 기업으로서의 교회, 개혁이 불가능한 기독교 등의 세부적인 비난 내용들을 세상에 외치며 활발히 운동을 벌여 나가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세상에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의 생명을 맛보여 주기도 전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왜곡된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전도의 큰 난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외침이 단지 기독교 진리를 왜곡한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진영을 갖춰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만, 이것이 본질을 상실한 기독교의 구태의 모습과 연루돼 현재 교회의 썩어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에 전도자들로 하여금 곤욕을 치르게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사회 종교’라고 불릴 수 있는 거대 연예인 사업과 스포츠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야구와 축구 등 인기 있는 스포츠들은 거대 사업가들의 투자와 날로 번창해가고 있는 미디어 산업, 그리고 사회적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원하는 시민들의 바람과 어우러져 거대한 ‘시민 종교 집단’이라 불릴 만큼 큰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도는 피전도자들의 한계와 불안, 그리고 삶의 무력함을 복음이라는 본질로 파고들어가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이미 스포츠와 연예계 사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있기에 전도자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스포츠와 연예계가 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을 넘어서는 참된 평강과 기쁨, 생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과 물질만능주의
오늘날 청소년들, 그리고 심심찮게는 성인들에게까지 유행하고 있는 것이 ‘좀비 문화’다. 좀비라고 하는 것은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말로 아이티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믿는 부두교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좀비 문화가 유행하면서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던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학생들이 이해하고 받아들게 됐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즉,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죽었다가 살아난 시체의 일종인 좀비를 통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좀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과 전도에 있어 너무도 심각한 문제다. 복음의 핵심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인데,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복음 전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잃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교회로 사람은 데려올 수 있어도 복음 안에 있는 생명으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은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의 요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와 ‘절대적’이라는 말이 영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발생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일한 구원과 동일한 진리를 향해 달려간다고 보며, 종교는 역사적 상황과 배경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는 다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예수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타종교를 기웃거리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만이 진리라고,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외치는 일은 예수 안에서 웬만큼 무장이 돼 있지 않고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됐다. 그렇기에 전도의 본질적인 의미에 충실해 복음 안에 있는 생명을 맛보지 않고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하기 어렵게 됐다.
이와 더불어 복음 전도에 있어 청소년들의 전도를 어렵게 하는 심각한 요소가 있다. 바로 ‘게임 문화’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거대한 시장을 가지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해 청소년뿐만이 아니라 성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매체를 통해 정기적으로 경기를 하고 우승자를 선정하는데, 그렇게 뽑힌 사람은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게임 문화가 복음 전도를 위협하는 이유는 현실과 이상을 혼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면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하고, 게임 안의 이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게임은 현실의 생활에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현재 나의 삶의 한계와 어려움을 바라보고 절대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줘야 할 전도에 악영향을 미친다. 게임 안에 설정된 이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예수가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은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기에 현실의 세계에 자신을 노출하기를 꺼려하는 익명성을 선호한다. 이러한 익명성 역시 전도에 큰 어려움을 가져온다. 죄가 드러나야, 한계가 나타나야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식하고 절대자를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그 영향을 받아 물질 지상주의로 흐를 수 있다. 물질 지상주의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교회에 흘러 들어온 물질 지상주의는 기복신앙과 합쳐져 극도의 개인주의 현상으로 치닫거나, 교회가 본질을 외면하고 겉치레에 치중하는 모습을 낳게 했다. 또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물질이 차지하게 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만든다.
이미 서구 사회에서는 경제적 성장과 풍요로움으로 인해 교회가 비워져 술집과 극장으로 팔려가는 사례가 속출했고, 독일에서는 종교세 납부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임을 부정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2012년 연감에 따르면, 25개 교단의 인구가 대체로 감소했고 총 1.15%가 줄어 종교 인구는 1억 4,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구의 이 같은 상황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전도에 있어 본질을 추구하지 못하는 교회의 부패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방해물이 되기도 하고,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힘을 잃어 가기에 본질적으로 전도를 어렵게 만든다. 복음이라는 본질이 죽어가고 물질이 판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도는 하나의 생명력을 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 낚는 어부’보다 ‘예수 따르는 제자’가 우선 어떻게 해야 열매 맺는 효율적이고도 능력 있는 전도를 할 수 있을까? 이미 앞에서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부분들을 고찰하면서 중간 중간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전도의 왜곡된 개념들과 방법들, 그리고 본질이 사라져버린 부분들이 정비되고 잘 준비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즉, 본질로 되돌아가 세상이 갖고 있지 못한 영원의 진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한다. 세상적인 방법과 기술만으로 세상을 끌어들이고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예수께서 완성해 놓으신 영원이라는 선물로 무장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상은 영원이라는 가치를 만날 때 비로소 굴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전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가장 잘못한 일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전도를 강조한 것이다. 성장 위주로 달려오면서 전도가 점차 왜곡되고 본질을 잃어버려 껍질만 남아 있는 모습을 갖게 됐다.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에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 프로그램, 리더십이 있다면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성장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기에 그렇게 성장한 교회는 자연히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성장이 멈추게 되고 그 후유증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교회가 지금 그러한 모습인 것 같다. 자신의 삶도 변화시키지 못한 예수를 어떻게 세상에 외칠 수 있을까? 외친다 한들 효과가 있을까?
다음으로는 피전도자들의 종교적 욕구를 파악해서 접촉점을 마련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나가 선포·홍보하거나 무조건 한 번만 사람을 데려오는 일로 전도가 진행돼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복음은 좋은 관계 속에서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미래목회포럼은 지난해 12월 열린 포럼에서 오늘날 비종교인들의 종교 욕구 가운데 첫 번째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일’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욕구를 어느 종교가 가장 잘 채워줄 수 있을까? 이미 성경에 나타난 답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이지 않을까? 그렇다. 오늘날 비종교인들의 관심은 무엇이고 그들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들을 향해 효율적인 전도를 할 수 있다. 전도의 대상자가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요, 전도학 석좌교수인 레너드 스윗(Renard Sweet)이 2년 전 한국을 방문해서 한 외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한국 교회를 향해 “한국 교회여! 예수로 돌아가라!”고 힘주어 외쳤다. 교회 안에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과 방법들은 난무하지만, 예수때문에 변화되고 고침 받고 세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점차 줄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 전도는 예수의 생명에 관한 말을 듣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하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잘못돼 고장 난다면 전도는 힘들어지거나 어려워지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 낚는 어부’의 미션을 먼저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일에 관한 미션을 먼저 주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온전히 따르려고 하기보다는 ‘사람 낚는 어부’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순서가 잘못됐다. 그렇기에 전도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다시 예수를 온전히 따름으로 그 생명을 경험하고 생명을 나누며 사람을 살리는 전도가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목회와 신학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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