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 오보에,현과 통저주음을 위한 협주곡 ,BWV1053R
이 협주곡은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 2번 [E장조,BWV1035]의 원곡 이다. 원곡인 오보에 협주곡 F장조는 작품이 분실되었으나 복원하여 쳄발로 협주곡과 함께 연주되고 있다. 1악장은 Cantata BWV 169의 두번째 Sinfonia로, 2악장은 Cantata BWV 169의 다섯번째 Aria로, 3악장은 Cantata BWV 49 Sinfonia로 사용되고 있는데, 1726년 작품인 이들 칸타타와 협주곡 사이에 원곡과 편곡의 관계는 없는 것 같다. 쳄발로 협주곡으로 편곡된 연대는 대략 1730년에서 1733년 사이인데, 라이프치히의 [텔레만 음악가협회]를 위하여, 또는 당시 상당한 기교를 익혔던 아들들과의 가정 음악회를 위하여 편곡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악보가 분실된 오보에 협주곡의 작곡연대는 이들 칸타타와 편곡된 쳄발로 협주곡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흐 / 쳄발로 협주곡 제2번 E장조 ,BWV1053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은 모두 다른 협주곡을 쳄발로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둘은 뛰어난 대위법적인 서법과 대규모 구조의 파악력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협주곡 양식을 계승하면서 그 내용을 한층 더 충실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바흐는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라이프치히시절(1723-1750)에 쳄발로 협주곡을 창시했고, 그것을 그가 감독으로 있던 콜레기움 무지쿰 에서 연주했다.
◆ 콜레기움 무지쿰 은 16세기 독일어권에서 음악이론 연구를 목적으로 하던 아카데미에 맞서는, 연주활동에 중점을 둔 단체가 사용하던 명칭으로, 17세기에는 거의 모든 대도시에 설립되었다. 멤버의 주체는 음악에 흥미를 가진 대학생으로 많은 콜레기움 무지쿰은 교육시설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궁정악사나 도시 전속악사가 가담하면서 규모가 커졌는데 저명한 작곡가들도 작품을 제공했다.
바흐는 1729년 봄부터 1737년 봄까지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휘자로 있었고, 그 후 1739년 가을에 복귀하여 ◆ 치머만 - 콜레기움 무지쿰의 연주회는 카터거리의 치머만의 커피점(당시는 커피가 유행, 커피칸타타등도 이런 맥락)에서 장이 열리지 않는 시기에는 주 1회, 장이 열리는 기간에는 주 2회, 보통은 가게 안에서 날씨가 좋은 때는 치머만의 정원에서 연주회가 열림 - 이 사망한 1741년 봄까지 지휘했다.
한편 17333년 6월 16일자 발행된 라이프치히의 정보지에 콜레기움 무지쿰에 대해 [이 곳에서는 아직 연주된 적이 없는 새로운 쳄발로가 첫선을 보이니 많은 음악애호는 물론 전문가도 크게 기대했으면 한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콜레기움 무지쿰은 많은 레퍼토리를 필요로 했고 이들 협주곡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흐의 공무도 아니었고 수입도 많지 않았지만 우수한 젊은 학생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이든 남의 작품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작품을 연주한다는 것, 그리고 공무에서 따르는 갈등으로부터의 해방감에서 큰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보다는 다른 악기를 위하여 쓴곡을 편곡하는 것이 당시의 정황에 어울렸을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또 이전의 비발디나 텔레만의 협주곡을 편곡한 것처럼, 편곡 자체에서 의의와 기쁨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편곡의 결과는 원곡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협주곡이 태어나고 쳄발로가 독주악기로서 각광을 받게되엇다.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들은 자녀들, 특히 엠마뉴엘 바흐와 크리스티안 바흐의 건반 협주곡을 통하여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가는 길을 열었으며 낡은 음악양식을 집대성한 바흐는 동시에 새로운 음악양식에도 자극 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