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더러운 좌빨들의 입으로 독립운동가 존함을 입에 담는가?
종북이 말하는 공산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민주우파독립운동가를 잡는 암살조였다는..
종북좀비들만 모르는 척하는 이 사실..
같은 우파반열에 있더라도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는 차원이 다르다.
전두환 노태우에게는 이론적인 것이 부족하고, 이승만 박정희는 분명히 격이 다른 민족주의자였다.
이승만은 반공멸공민주주의의 시조라고 하며 부정적인 평을 내리며 좌파 학자들이 공격하나, 이는 일제시대 우파민족주의가 1940년대로 가면서 반공화된 것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해야 된다.
이승만 박사 외에도 반공우파의 초대 지도자들은 건국의 주역들로서 창랑 장택상박사, 유석 조병옥박사, 해공 신익희선생, 우당 이시영선생, 철기 이범석장군, 백파 김학규장군, 함태영 선생, 이인 선생, 지청천 장군, 조만식선생이 모두 반공우파 독립운동가였다.
우파독립운동가들이 왜 반공적 성격을 띄게 됐을까? 일제당시 우파민족주의 독립운동가와 좌파사회주의자들 간의 알력과 갈등이 원인이다.
1921년에 좌파온건파인 단재 신채호가 이승만박사를 공격했다. 이승만박사를 시기하여 축출한 좌파들은 공세수위를 높여 안창호, 신규식까지 괴롭혀 임시정부내에서 우파 정치인들을 제거하려 했다.
1931년 좌파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암살미수하였다. 김원봉의 의열단과 조선공산당 등이 세작을 보내 임시정부를 와해하려 했고 첩자를 보내 현익철 등을 암살했으며, 김구 역시 암살의 고비를 넘겼다.
이 내분의 배경에는 만주의 자생좌파 테러단체인 의열단과, 김원봉의 소련계 고려공산당과 김무정 등의 중공 홍군과 연결된 조선공산당이 있다. 의열단은 특히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김두한의 부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들이고, 고려공산당과 연락하던 소련내 한인부대는 홍범도와 서일의 부대를 자유시에서 대량 학살하여, 9백명이 죽고 8백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홍범도와 서일은 패전을 통감하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의열단과 조선공산당, 그 외 소련계 고려공산당은 만주의 독립군 군벌을 탄압했다.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에는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세작들의 침투로 고려공산당은 서일장군과 홍범도의 부대를 백러시아 군을 격퇴하는데 이용했다가 강제무장해제를 시켰으나 불응하자 9백명을 살해하고 8백명을 납치하여 독립군부대를 와해시켰다.
서일과 홍범도는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여 자결하고, 김좌진은 최초의 반공주의자가 됐으나 역시 고려공산당 세작 손에 암살됐다. 이어서 장군 김규식과 신규식 등이 모두 좌익 손에 살해됐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비열한 탄압으로 1940년대에 가면 우파민족주의 독립운동은 지리멸렬하게 된다. 악순환까지 겹쳐서 안창호도 임시정부의 지원을 못받고 1932년 거사때는 연락도 받지 못하고 수감되고 급기야는 임정에서 버림받게 되는데, 미국에서 이승만을 도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좌파들은 악착같이 안창호를 물어뜯고 헐뜯었다.
잇달아 우파 독립투사들이 좌파들 손에 암살되자, 낙심한 안창호는 죽어가면서 헛된 요행을 바라지 말고 현실에 순응해 살라는 말을 남겼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미국에서 교육활동에 힘썼던 안창호다. 그런 안창호가 절망하여 마지막으로 외친 절규인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외교와 안보강연활동을 했다면 안창호는 미국 교민들에게 성실함과 무행과 실력양성을 외치고 미국민에게 폐끼치지 말고 참되고 올바른 민족근성을 일깨우는데 노력했다.
그런 안창호가 절망과 울분을 토하며 죽어갔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사회주의자들의 계속된 테러에 말년에는 친일로 전향했다.
동료들의 비참한 죽음과 좌파들의 교활함을 이미 임시정부때부터 목격한 이승만 박사가 반공일변도의 반공민주주의를 외친 것은 실책이 아니다. 우파민족주의자 최후 생존자들은 당연히 반공민족주의로 귀결되어 갔다.
이승만 박사만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도 반공민족주의자였고 우사 김규식도 강력한 반공민족주의자였다. 고당 조만식은 북녘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유일하게 북한 공산주의 세력확장에 맞서고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수호하다가 1952년에 살해됐다. 이미 여운형과 김규식이 조만식을 구출하려 밀담하고 이승만박사도 사람을 보내 조만식을 구출하려 했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북한에 남아 가련한 민초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반공민주주의자로 남북협상을 주도했던 우사 김규식 박사. 그는 여운형과는 만났으나 좌익이상세계를 꿈꾼 박헌영을 증오했고, 좌파에 속한 자들을 가리켜 한번 붉은물든 자들은 죽어도 빨갱이라고 했던 그였다. 김규식은 1950년 6.25 와중에 납치됐고 반공인사라 하여 1952년 우사는 만포진에서 인민군에 의해 살해됐다.
1970년대에 박정희가 남북교류를 시작하면서 당시 알게된 사실로 70년대 이후 김대중집권 전까지의 백과사전에는 김규식박사가 1952년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김대중 이후로는 북한측의 주장대로 1950년으로 바꿔버렸다. 북한은 김규식을 살해해놓고 "그가 1950년에 병사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조만식과 함께 죽었다."는 등 거짓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도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버려져있던 김규식 박사의 묘소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해놓고 있다.
여운형도 좌파이상주의자요, 박헌영도 좌파이상주의자이기는 같으나, 여운형은 우파를 인정하는 민주적인 선거제도의 나라를 생각한 것이고 박헌영은 완벽한 사회주의국가를 이상향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좌파는 좌파들이다.
좌파들의 반칙행위는 일제이후로 계속되어 왔다. 김구 역시 반공주의자였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홍범도, 서일, 장군 김규식, 김좌진, 현익철 등 애국지사들을 암살한 것도 좌파들이었다. 좌파들의 내부분란으로 독립이 지연됐다고 볼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신채호는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오진국을 하와이로 보냈으나 오진국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고민하다 결국 자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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