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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스크랩] 도르트 회의, 메이플라워 서약

by 설렘심목 2012. 3. 6.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 1618-1619)

 

16181113일 화란의 도르트에서 화란 의회에 의해 교회 회의가 개최.

제네바 학파를 이끌던 칼빈의 수제자 베자가 확정한 '전택설적 예정론'에 반대하던 사람으로 라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의 교수 야곱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가 있었다. 1580년대에 베자에게서 배우던 알미니우스는 위켄보르케트와 함께 칼빈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자주 제기했다. 베자가 죽은 후, 알미누우스와 위켄보르케트의 활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알미니우스가 1609년에 갑작스럽게 죽게 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스승의 입장을 정리하여 정통 칼빈주의에 대항하게 되는데, 1610년 알미니안들 43명은 예정론을 주장하는 정통파 입장에 반대하는 항변서(Remonstrance)를 위켄보르케트의 작성 하에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으로서 발표했습니다.

 

1.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의 예지에 기초하여 선택하시고 또한 유기하신다.

2.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3. 믿음과 선행에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있다.

5. 중생자의 견인에 관하여는 좀 더 연구할 여지가 있다.

 

이와 더불어 알미니안들은 화란 교회의 신조를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Gomarus) 진영의 정통파에서는 즉각 '반항변서'(Counter-Remonstrance)를 내었고, 161811월부터 16195월까지 7개월간 154번의 정식상의 교회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각 지방 교회회의에서 선출된 대표들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독일의 칼빈주의 교회의 대표들도 고문으로 참석했다. 화란 의회는 정식 대표 56명을 보냈다. 알미니우스파의 견해에 반대하는 정통교리를 작성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도르트 신조라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렇게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된 위의 5대 신조는, 각 교리의 첫 자를 따서 일명 '튤립(TURIP) 교리'라고도 불렀다. 이 도르트 신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는 성경적 교리를 분명하게 확증한 것이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인 만큼,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천명한 것이다. 이 회의가 결정한 핵심 내용들은 이후에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알미니안주의의 주요 교리는 4세기에 어거스틴의 전적 타락에 반대한 펠라기우스주의와 6세기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주장과 동일 선상에 위치한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의 정신은, 앞선 교회가 성경에 근거해서 형성해 낸 신앙고백의 정통성에 의거하여, 다시금 '개혁되어진 신앙고백'(Confession Reformed)을 이어내고, 그렇게 해서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나아가야 할 보다 더 성경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그래서 자체적으로 계속해서 교회를 보다 더 성경에 가깝게 개혁해 나가는 것(Reforming)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메이플라워서약서 [Mayflower Compact]

 

16201111일 필그림 파더스[巡禮始祖]에 의하여, 플리머스 상륙에 앞서 메이플라워호()의 선실에서 서명된 서약서. 일명 메이플라워 계약으로 불리며,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에 온 필그림 파더스가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하기 전 체결했다. 식민지 사람의 절반은 영국 국교회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요구했던 분리파 집단의 일부였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16201120(율리우스력 1111)에 케이프코드 주변 현재 프라빈스 타운 항구에서 메이플라워 호에 타고 있던 102명의 승객 중 41명이 서명했다.[1]

그들은 당초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에 도착할 수 없게 되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받은 특허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승선자(乘船者) 중 성인남자 전원의 서약으로 자주적 식민지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결정하여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청교도적 사회계약은 플리머스 식민지의 기본법이 되었고, 1691년 이 지역이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으며, 이후 미국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약식 광경

 

서약 이유

 

메이플라워 호는 당초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서 영국 왕실이 칙허한 땅인 허드슨 강 하구를 목적지로 잡았다. 그러나 긴 여정과 추운 겨울이 닥쳐왔기 때문에 목적지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상륙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이방인"(종교 집회의 회원이 아니었던 개척자들) 중에서 버지니아 회사가 허가한 영토에 개척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아무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불만이 흘러나왔다.[2] 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른 식민지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메이플라워 호의 승객은 162011월 플리머스에 도착했다.(플리머스라는 지명은 존 스미스 선장이 이전에 명명했다.) 개척자들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출항했던 영국의 데본 주에 있는 항구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 개척지를 "플리머스"(Plimouth)라고 불렀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동시에 다수결 원리 모델을 기반으로 하며 (서명자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개척자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했다. 기본적으로 개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약 규칙과 규정을 준수할 것에 동의하는 사회 계약이 되었다.

 

내용

 

메이플라워 서약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에드워드 윈슬로우가 쓴 모트 이야기(Mourt's Relation),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저널 플리머스 농장에 대해’(Of Plymouth Plantation)의 사본 내용이 일치하여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브래드퍼드 필사본은 매사추세츠 주 주립 도서관의 특별 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다. 브래드퍼드 필사본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3]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그 이름들이 아래 씌어 있는 우리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대영국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우리들의 경이로운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요 신앙의 옹호자인 제임스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시도하였던 바, 본 증서를 통하여 우리들의 보다 더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 그리고 전술된 목적들의 촉진을 위하여 엄숙하게 상호간에 하나님과 서로의 면전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시민적 정치 단체로 결속한다. 그리하여 이에 바탕 하여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과 결정 그리고 관직을 수시로 제정하고 구성하고 조직하기로 한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4]

이곳 케이프코드 곶에서 우리의 이름을 서명한 바와 같다. 우리들의 최고 통치자 제임스 왕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의 치세 18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의 통치 54, 서기 16201111

 

서명자

 

서명한 아래의 41명의 승객 목록은 브래드퍼드 조카 나다니엘 모튼이 1669년에 쓴 뉴잉글랜드 기념(New England's Memorial)에 기록되어 있다.[5] 이와 관련된 초기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포드, 에드워드 윈슬로우, 윌리엄 브루스터, 아이작 앨러튼, 마일즈 스탠디시, 존 알덴, 사무엘 풀러, 크리스토퍼 마틴, 윌리엄 멀린, 윌리엄 화이트, 리처드 워런, 존 하우랜드, 스티븐 홉킨스, 에드워드 틸리, 존 틸리, 프랜시스 쿡, 토마스 로저스, 토마스 틴커, 존 릿지데일, 에드워드 풀러, 존 터너, 프랜시스 이튼, 제임스 칠튼, 존 크랙스튼, 존 빌링튼, 죠지즈 플레쳐, 존 굿맨, 디거리 프리스트, 토마스 윌리엄즈, 길버트 윈슬로, 어드먼드 마지슨, 피터 브라운, 리처드 비타릿지, 조지 소울, 리처드 클라크, 리처드 가디너, 존 앨러튼, 토마스 잉글리시, 에드워드 도텐, 에드워드 레스터

 

 

토마스 프린스의 1736년 저서 뉴잉글랜드 연대별 역사(A Chronological History of New-England in the form of Annals)에서는 동일한 목록이 동일한 순서로 실려 있지만 몇 가지가 수정되어 있다. 프린스는 브래드포드 주지사가 필사한 목록에서 찾아낸 10명의 이름에 ""(Mr.)를 보충했다. 브래드퍼드의 이름에 ""가 없는 것은 브래드퍼드 겸손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스탠디시는 "캡틴"(Capt.)을 추가했다. 5명의 이름(John Crackston, Moses Fletcher, Degory Priest, Richard Briterige, Ed Dotey.)은 철자를 수정했다. 게다가 프랜시스 ’(Francis Cook)과 리처드 클러크’(Richard Clarke)라고 표기를 했다. 그러나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저널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Of Plymouth Plantation)에서는 프랜시스 쿡을 Francis Cooke으로 리처드 클라크를 Richard Clarke로 모두 성에 e를 붙여서 썼다.

 

주석

1. Rothbard, Murray Rothbard (1975). ""The Founding of Plymouth Colony"". Conceived in Liberty. 1. Arlington House Publishers.

2. Bradford, William (1898). "Book 2, Anno 1620". In Hildebrandt, Ted (PDF). Bradford's History "Of Plimoth Plantation". Boston: Wright & Potter. Retrieved 2006-06-01.

3. State Library of Massachusetts Online catalog

4. The Mayflower Compact (1620)

5. Morton, Nathaniel (1669). "Chapter 2". In Rhys, Ernest. New England’s Memorial. The 1772 reprint of Morton has a totally different order.

출처 :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려) 중부노회
글쓴이 : 장재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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