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의 生涯와 思想
1. 그의 생애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Alsace)지방의 카이저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후 얼마되지 않아서 집안이 귄스바흐에 이사하여 그곳이 고향이 되었다. 그가 자라난 알자스는 독일과 불란서 사이에 계속적으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어서 그는 두가지 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 곳은 新舊 兩 기독교의 갈등을 비교적 조용히 보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思考를 갖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은 행복하게 보내었고 18세에 불란서의 스트라스부르(Strasburg)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그가 연구한 기간에 그 학교의 주도적인 교수는 홀쯔만(H.J. Holtzmann) 교수였다. 그 당시 그 학교에는 유명한 철학자 빈델반트(Windelband)도 있었다. 그는 베를린과 파리에서도 얼마간 지난적이 있다.
그의 저술 생애는 나이 젊었을때부터 시작되었다. 1899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은 “칸트의 종교철학”( Die Religions Philosophie Kants )이었고 그 논문은 출판되었다. 그로써 스트랏스부르의 성 니꼴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901년에 그는 목사고시와 관련해서 “주님의 만찬”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 1901년 메시아의 비밀에 관한 브레데의 저서도 역시 출판되었다. 또한 흥미있는 것은 바로 이 해에 슈바이처가 “Das Messianitats und Leidensgeheimnis”(메시아의 비밀과 수난의 비밀)이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후 1914년에 이 저서는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란 표제 하에 英譯 出版되었다.
슈바이처는 1904년 파리 선교사협의회가 매월 발행하고 있는 사업보고서에서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선교 사업과 사회 구제 사업이 사람 부족으로 흑인 구제 사업이 정지 상태에 있다는 글을 보고서 그의 一生을 奉仕의 생활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5년 그는 그의 나이 30세에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05년에서 1912년까지 그는 의학을 연구하였다. 이 준비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저서 몇 권을 저술하였다. ”Von Reimarus zu Wrede"(1906)가 그중 한 권이며, 영역판은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의 탐구)란 표제로 출판되었다. 1913년에 중보 재판이 나왔다. 1911년에 그는 ”Qeschichte der Paulinischen Forschung"(바울연구에 관한 역사)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그 다음 해에 “Paul and His Interpreters"(바울과 그의 해석자들)이란 영역판이 나왔다.
여러해 후인 1929년에 그는 “The Mysticism of Paul"(바울의 신비주의)란 대작을 내었다. 1913년에는 그의 의학박사 논문이 출판되었다. 이 논문은 “The Psychiatric Estimate of Jesus”(예수에 대한 정신병학적 평가)라는 제목이다.
1912년 헤레네 브레스라우 양과 결혼하고 아프리카 행 준비를 하다가 1913년 3월 24일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선교 본부로부터 아프리카의 佛英 적도 지대를 다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고, 그는 수년 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비교적 계속하여 거기서 일을 하였다. 1913-1917년까지 그는 세계 제 1차 대전으로 인해 구속을 당했다. 2차 대전시에도 이와 비슷한 형편이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유럽에서 지내면서 선교 활동을 위한 모금을 하였다. 그는 주로 올갠 연주회를 가짐으로서 이 모금 운동을 하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올갠니스트 중의 한 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바하(Johann Sebastian Bach)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905년 그는 바하의 생애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올갠 구조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것은 유럽의 올갠들을 근거로 한 연구였다.
그의 저술은 그의 선교활동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선교경험으로 부터 “From the Edge of the Primeval Forest”(원시림의 끝에서, 1925)란 저서를 저술하였다. 이 기간에 자서전 “Out of my Life and Thought”(나의 생애와 사상으로부터)라는 저서도 저술하였다.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고 1951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1957년에는 원폭 실험 금지를 호소하는 일로써 전 정력을 바치기도 하였다. 1965년 그의 나이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바이처는 철학도 무시하지 않았다. 1923년 그는 “The Decay and Restoration of Civilization”(문화의 몰락과 회복)이란 대작을 출판했다. 이 저서에 뒤이어 제 2권인 “Civilization and Ethics”(문화와 윤리)라는 저서를 내어 놓았다. 그의 철학은 때때로 “生命의 敬畏(Ehrfurcht vor Leben; Reverrance for life)”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윤리적 신비 주의와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란 강력한 윤리의 배음과 저음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종교란 사람들과 사회 안에서 그 자체를 어떤 사회적인 관심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생에 대한 외경,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등 이러한 것들은 예수의 정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음악, 의학, 철학 그리고 신학 4개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떤 학파를 이루고자 출발하지는 않았으나, 신약분야에 끼친 그의 영향은 금세기에 어떤 사람도 따라 갈 자가 없다.
2. 슈바이처의 神學
1) 예수와 王國 設立
보스(Geerhardus Vos)는 메시아직에 관한 슈바이처의 견해를 “장래의 메시아직을 믿는 신앙”이라고 분류하였다. 슈바이처와 브레데는 다 맹열한 방법으로 마태복음 우선설을 공격한다. 또한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비난한다. 슈바이처는 브레데가 말한 은밀한 현상들을 역시 일반적으로 훌륭한 강조라고 생각하였다. 슈바이처가 브레데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브레데가 말하는 마가의 敎理를 슈바이처는 예수의 敎理라고 한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敎理的 要素는 분명히 歷史的 要素”라고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는 복음 증거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 저자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은밀한 메시아직이란 신학사상은 예수님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단순히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장래 나라의 반포자였다고 하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격변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 나라가 이룩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로서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비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시작될 장래의 메시아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종말론적으로 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가 자기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던 해, 즉 추수 때에 이 나라가 임할 줄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는 그 나라가 임하시기 전에 그들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마10:23은 슈바이처가 주장하는 학설의 요절이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던 격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로 부터 그의 계획들은 변화를 일으켰다. παρουσια(오심)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으며, 또한 마태복음 10장의 수난의 예언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인자의 오심을 위하여 박해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전연 오지를 않았다. 예수님의 계시적 고대에 의하면 이 수난들을 그 나라가 임하심에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런 것들이 강제적으로 오도록 하는 일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이제” 그것들이 자신 속에서 成就시켜, 그 나라를 세상에 나타낼 것으로 결심하였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자기가 죽자마자 곧 승리가 따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나라는 임할 것이고 역사는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는 종말도 오지 않았다. 역사를 예수의 목적으로 왜곡하려는 놀라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목적대로 왜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임박한 王國이 설립되면 자신이 메시야로 나타날 것을 믿고 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2) 메시아의 비밀
자기가 메시아였다는 예수님의 이 미혹은 비밀이었다. 그는 장차 그 나라가 갑자기 임하실 때 나타날 메시아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드러내놓고 자신이 메시아로서 행동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이 비밀을 세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나타내었다. 그 후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열 두 제자들에게 공개했다. 이 비밀의 세번째 폭로는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가 배신함으로 대제사장에게 이 비밀을 제공할 때 일어났다. 심문에서 대제사장은 무지한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주장으로 인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슈바이처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직 주장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3) 일시적 윤리
슈바이처는 예수님께서 윤리적인 교훈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윤리적인 교훈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상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고 한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님의 윤리는 어떤 일시적 윤리였다. 즉, 그 나라가 임박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은 그 나라가 임하기 까지의 짧은 기간에만 유효한 것이다. 이 일시적 윤리교훈은 회개라는 한 마디로 간추릴 수가 있다. 회개란 그 나라의 임하심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슈바이처의 未來的 終末論
슈바이처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메세지를 철저히 ‘終末’이란 배경 아래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종말론은 유대의 啓示文學의 종말론의 線上에 놓여 있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나라는 현재의 靈的 實在가 아니다.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소위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도 한다. 그에 의하면, 그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으로 올 미래의 實在였다. 슈바이처에게는 ‘역사적 예수’가 1세기의 啓示文學者처럼 생각되었다.
5) 슈바이처의 제자들
슈바이처는 슈바이처 이후의 思想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튜빙겐 학파나 리출을 중심하여 일어난 것과 같은 그러한 실재적 사상학파를 이룩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슈바이처의 노선에서 論文들이 더러 나왔다. 독일에서는 미가엘리스(Wilhelm Michaelis)가 어떤 수정된 형식으로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교훈은 한가지의 견해점, 즉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적이요, 임박한 것이었다는 견해점에서 시종 해석되어야한다고 하였다.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와 볼트만(Rudolf Bultmann)도 어느 정도까지 슈바이처(Schweitzer)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불트만(Bultmann) 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선포하는 유대인의 묵시적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뷰르킷(F.C. Burkitt)이 슈바이처를 대변하였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스콧트(Ernst.F.Scott)와 이스톤(B.S.Easton) 두 사람이 손꼽히는 슈바이처 해석자였다. 스콧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묵시적 나라의 임박한 임하심을 준비케하는 것이 예수님의사명이었다는 슈바이처의 근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슈바이처와는 달리 스콧트는 예수님은 그의 인격 안에서 오실 나라의 법을 이미 실현시켰었다고 주장한다. 그 나라는 너무나 임박하였기 때문에 그 권세들은 이미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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