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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usic

대한민국국민이라면 한번 꼭 들어봐야 할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 )

by 설렘심목 2011. 2. 6.

제 1 부 : 개국과 평화로운 우리 조국 
제 2 부 :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
제 3 부 : 조국의 광복
제 4 부 : 한국전쟁과 조국의 영광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 )에 대하여

애국가로 더 잘 알려진 '한국 환상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망향의 설움과 조국의 웅대한 비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애국가를 부르는 한 영원히 잊지 못할 작곡가 안익태는

우리 나라 음악인들이 세계 무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세계적인 대가들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웠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음악의 선구자’였다.

일본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올드 랭 사인> 선율의 애국가를 듣는 순간

그는 빼앗긴 조국을 회상하며 <애국가>를 작곡하려는 결심을 했다.

신시내티 음악원과 필라델피아 음대, 커티스 음악원을 거치면서 작곡과 지휘에 눈을 돌린 그는 마침내..

뉴욕 카네기홀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해 애국가 부분이 없는 <한국 환상곡>을 작곡해,

이 콩쿠르에서 입선했다.

 

1936년 다시 유럽으로 유학을 오르게 되어 베를린에 도착해

그 해 6월 귓가를 스쳐가는 멜로디에 잠을 깬 안익태는 이 선율을 오선지에 적었는데,

두 번 다시 수정하거나 재검토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대한 애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정리해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국민회 앞으로 보냈으며,

자신의 미완성인 <한국 환상곡>의 마지막 악장으로 사용하였다.

2년 후인 1938년에 이 곡은 안익태가 지휘하는 더블린의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 작품해설 *

 

한국 환상곡'은 이처럼 애국가를 끝악장으로 해서 제3부로 나누어 나오다가

6ㆍ25전쟁 이후에 다시 제4부가 추가되었다.

 

○ 1부는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서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을 그려내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관현악의 장대한 울림은 우리 나라의 탄생을 알리고,

호른의 서정적인 멜로디는 아름다운 강산을 표현하며,

이어 플루트와 금관악기군이 대화풍으로 민요가락을 노래하고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 2부는 일제 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진혼곡의 멜로디가 무겁고 침통한 선율로 이어진다.

 

○ 3부는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서 애국가는 전조를 되풀이하며 감격적인 합창으로 진행한다.

 

○ 4부는 6ㆍ25 전쟁의 처절함을 묘사했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퍼진 뒤에

‘무궁화 삼천리 금수강산 나의 사랑아’의 만세 소리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작곡가 * 안익태 (安益泰 1906~1965) : 지휘자. 첼로 연주자. 작곡가. 평양 출생.

어릴 적 예배당의 찬송가에 이끌려 음악수업을 시작하여 그 뒤 선교사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4년 평양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해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고등음악학교(현 쿠니다찌음악대학 전신)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뒤이어 신시내티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 주자로 입단하여 동양인 최초의 주자가 되었다.

그 뒤 필라델피아교향악단에도 입단하였으며, 신시내티,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첼로독주회를 가졌다.

 

1934년 유럽으로 가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 및 작곡을 수업하였으며,

1936년 프레스장학금을 받고 빈에서 R.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를 배웠다.

이때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1939년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하고 그 뒤 각국을 돌아다니며

파리 콩세르, 런던 로열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일본 NHK 등 200여의 유명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이 무렵 스페인 여성 타라베라와 결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요르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57년 일시 귀국하여 자작의 <강천성악(降天聲樂)>, <한국환상곡>등을 지휘하였다.

1962년에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지휘하였고

그 뒤 제2회부터 제4회까지 서울국제음악제를 주도하고 지휘를 맡았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뉴필하모니의 초청지휘자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애(哀)! 강상의 의기 논개>를 연주하고,

그 해 9월 17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1977년 7월 유해가 한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