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개척목회현장의 애환을 구구절절, 극명하게 호소한 글로서 비록 대안제시가 없어서 완성된 논제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많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심경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목회자를 지망하여 헌신된 자라면 필독할만한 글이라 추천한다. - 2010. 10. 10. Benabon solleim>
개척 교회 목사의 애환
본인이 말하는 개척 교회란 개척한 연조가 얼마가 되었건 계속하여 자립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는 모든 미자립 교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1. 물질의 애환
개척 교회 목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물질의 고통이다. 개척하는 목사의 가장 힘든 시기는 개척할 당시가 아니라,
대략 개척하여 2-3년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희망도 있고, 비전도 다치지 않았으며, 도움의 손길도 있고,
어느 정도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이 있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설레는 마음도 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면 모든 기반들이 다 바닥나고, 마침내 끝을 향해 간다.
교회 임대 기간은 끝나 가고, 평균 100여만 원 전후의 월세를 내지 못한다.
대부분 사택도 월세로 있기 때문에 월 30-50여만 원의 월세가 따라 나간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있던 도움의 손길도 끊어지고,
교회를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함과 목회에 전념치 못한 죄악에 대한 지탄과 비난에 대하여 면책의 길이 없다.
문제는 이 시기에 들어서면 어떠한 대안도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개척 후 지난 2-3년 동안 목사 개인이 할 수 있는 부흥과 성장의 길은 다 써먹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이 시기에 유일한 경제적 대책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오직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목사를 만드시는 기간이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만큼의 돈을 주신다. 아주 빈약하게,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일상의 작은 돈을 두고 늘 기도해야 한다. "전기세 주세요. 아이 차비 주세요. 쌀 살 돈을 주세요."
초라하고 비참한 기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열등감을 이기고, 세상길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시기가 이 기간이다.
이때 눈물의 골방 기도를 배우지 못하면 영적으로 승리하는 목사로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다.
하나님은 목사가 제일 먼저 진정하게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아내가 직장을 가지고 경제적 대안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또 다를 수 있다.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쪼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음이 오히려 영원히 개척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일 수도 있다.
2. 사람 없음에 대한 애환
사람 숫자가 적고, 반듯한 사람 하나 없고, 쓸 만한 사람 하나 없다.
지속적인 사람의 기근 속에 개척 교회 목사는 말라 가고, 비틀어져 가고, 왜곡되어 간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 삶의 질과 품격이 결정되는데,
2-3년이 지나도 일어서지 못하는 개척 교회 목회를 몇 년 계속하고 나면 목사가 저질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고, 무식해지고, 삶의 품격이 저절로 떨어지게 된다.
상류층은 상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있고,
하류층은 하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따로 있다.
과거에 가정부를 3명이나 두고 아주 부자로 살던 사람이 나의 성령 사역에 매료를 느껴 새성교회에 등록했다.
3개월을 다니더니 그만 가 버렸다.
그의 바로 앞자리에 노숙자 같은 형편없는 정신이상자 교인이 있어 목사가 설교하면 일일이 토를 달며 대꾸하는 것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더니,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가 버렸다. (비록 그가 떠난 여러 가지 요인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개척 교회 목사는 저절로 저질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고, 그저 그렇게 변해 간다.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며, 살아남지를 못한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설교 스타일, 찬란한 비전과 고급스러웠던 신앙관은 막노동판의 노가다 신앙으로 바뀐다.
고급스런 신앙이 있고, 노가다판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누가 이 개척 교회 목사의 비애를 알까?
3. 목표와 비전 상실감의 애환
개척 초기에 목회 목표를 세우고 비전을 꿈꾼다. 대부분 휘황찬란한 멋진 것이다.
그러나 처음 가졌던 그 목표와 비전은 사상누각이다.
개척 교회 현실과 목회 현장을 전혀 모르는 목표와 비전이기 때문이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혼자만의 공상을 꿈꾼 것이다.
개척하면서 "내년에는 30명, 그 다음 해에는 50명, 후년에는 100명! 또는 올해는 개척, 내년에는 이전,
후년에는 교회 건축!" 이 얼마나 찬란한 목표와 비전이란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개척한 지 3년 이후다.
통계는 개척한 지 1년이면 28여 명, 2년이면 23여 명, 3년이면 19명 이하로 내려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린다.
이 시대에는 이런 통계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기를 바라다니 어불성설도 유만부동이지!
예전에 교회를 세울 때 나는 '내가 바라는 장로상'을 이렇게 마음으로 생각하고, 교인들에게 천명했다.
이런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절대 장로를 세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 주님은 기본이고, 목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헌신 ‧ 충성하는 자.
2) 죽을 때 전 재산을 교회에 내놓을 수 있는 자 .
3) 목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
4) 7년이 지나면 시무를 사임하고,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사심 없이 사역 장로로 섬길 자.
꼬박 11년을 개척 교회를 섬기며 고생하고 나서 내리는 결론이 무엇인가?
그런 장로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님이여! 꿈을 깨라.
그러한 장로를 세우겠다고 말하지 말고, 그러한 장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사 자기는 땅에서 형편없는 영성으로 헤매면서, 하늘의 천사 같은 장로를 찾으면 되겠는가?
4. 자기 관리 부실의 애환
하루하루, 한 주간 한 주간, 아무 일정도 계획도 규범도 질서도 없다. 되는 대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들의 대부분은 할 일 없음, 답답함, 한숨, 고통스러운 마음, 열등감, 비참함, 영적으로 무너짐 등의 시간들이다.
성도들이 있고, 장로가 있는 기존 교회는 타의에 매여서라도 기본 일정이라도 있지만,
개척 교회 목사는 그러한 틀 자체가 아예 없다.
개척 교회의 하루, 일주일, 한 달은 100% 목사의 자율에 의해 결정된다.
완전 자유의 삶에서 과연 얼마나 목사가 자기를 통제하며 절제하며 일정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할 일 없음, 낙담, 절망, 좌절, 한숨, 비애, 가난, 부부 싸움 속에서 하루가 가고, 한 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간다.
갈수록 점점 찌들어 간다. 목회를 그만두지도 못한다. 왜 그만두지 못할까?
어차피 안 될 일인데. 소명 때문에? 정말 소명 받은 것이 맞을까?
오늘날 소명 받은 목사들이 왜 수만 명씩이나 교회를 맡지 못할까?
그나마 겨우 맡은 교회마저도 목회의 기본도 안 되고, 성장 부흥이 안 될까?
5. 영적 정체성에 대한 애환
개척 교회에서 돈 없고, 사람 없이 수년을 보내고 나면,
목사인 자기의 신앙과 인격과 자질의 뿌리까지 다 드러난다.
아아! 그 벌거벗은 모습이라니, 스스로의 인격과 영성의 헐벗었음을 바라보노라면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뭐 하나 주님 앞에 영성이 훈련된 것이 없다.
교인이 많이 있고, 예배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기성 교회에서는 목사 스스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영성이 어느 수준인지 측정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과거에 담임목사를 2년 하고, 부목사를 4년 사역했다. 당시에 나의 믿음과 영성이 대단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텅 빈 교회당, 낙담과 좌절, 가난, 무의미성에 찌들어 멍해진 눈동자로 맥없이 앉아 있는 아내를 바라보면,
예배 인도는커녕 이미 영성이랄 것도 없다. 강대상에 서 있기도 힘들다.
개척 교회를 11년간 목회한 지금 나는 인생의 바닥, 신앙의 바닥,
정말 나를 부인하는 원점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진정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주 예수님, 성령님 한 분만을 모시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부유이며 전부이며 전 재산이다.
개척 교회 목회자의 자기 영성을 스스로 진단해 보면, 대충 이렇다.
1) 기도 훈련 전무 - 하루 한 시간도 채 진지하게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 자리에 앉아 있어도 푸념과 신세타령만 나올 뿐이다.
2) 말씀 묵상 훈련 전무 - 매일매일의 말씀 묵상이 전혀 없다. 설교 준비에 급급하여 겨우 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요즈음같이 남의 설교를 도용하기 쉬운 시절이 또 있었던가?
말씀 묵상 훈련은 설교하는 목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지속하기 힘든 성실성의 산물이다.
3) 전도 열정 전무 - 개척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전도하지 않고, 전도해 보지 않았고, 전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혼 구원에 대한 구령의 심정이 전혀 없다.
좋은 교인이 그냥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세월을 일 년, 이 년 보낸다. 늘어 가는 것은 한숨뿐이다.
그러다가 스스로 열 받는다.
아아! 어리석게도 나는 수년간을 교회 출입문을 얼마나 수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만 있었던가?
4) 영적 지식 무지 - 영적으로 뚫린 게 하나도 없다.
겨우 신학교에서 배운 것 정도지, 실제적, 영적 삶의 지식이 전무하다.
공부를 하기 위한 과정의 공부와 현장의 필요에 의해 하는 삶의 공부는 전혀 질이 다르다.
나는 고난의 목회 속에서 진실로 삶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5) 인격 수련 전무 - 영혼을 지도하는 목사는커녕, 하나님 앞에 한 인간도 미처 채 되지 못한 자기를 뒤늦게 발견한다.
차라리 성도의 믿음이 훨씬 나음을 스스로 시인하게 된다.
이상의 여러 가지에 있어서 자기의 형편없는 인격, 영성, 처신, 무지를 새삼 발견하고 절망하게 된다.
지난 세월에 나는 자주 이렇게 자조했다. "나는 뭐하고 쉰 평생을 살았지?", "내 목회의 진정한 열매가 무엇이지?",
"에이! 이 개차반 같은 인격!", "더러운 성질!", "개 같은 인간!", "거지만도 못한 인간!", "비겁한 인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
자기에게 철저히 절망해야, 철저히 자기를 버리게 된다.
똥 같은 내 인격, 쓰레기 같은 내 존재를 깡그리 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목사로 첫출발할 자세가 된다.
이것이 개척 교회 목회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되고, 발가벗게 된다.
그래서 은혜인 동시에 비애요, 새로운 출발인 동시에 비극이다.
6. 목사 아내의 애환
1) 한 여인의 비참함을 본다. 나름대로 지성 있고, 당당했고, 똑똑한 품격이 있고, 잘났던 미혼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을 잘못 만나 신세를 망쳐 버렸다. 모든 면에서 무참하게 망가진다.
사람은 돈이 없으면 모든 품격과 기본이 다 무너진다.
2) 경제적으로 쪼들린다. 바가지 긁을 곳은 목사 밖에 없다. 그 속에서 목사와 사모의 인격과 본성은 뿌리까지 드러난다.
원색적으로 부딪친다. 성격차이, 고집, 감수성, 견해차이, 관점차이, 불순종, 목사무시, 설교비판, 인격매도, 신세타령.
아직도 멀었다. 진짜 힘들어지면 사모가 기가 완전히 꺾인다. 싸움도 힘이 있어야 싸우지.
아내의 시체를 밟고 목회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목사는 밟아 죽인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목사다. 개척 교회 목사는 진정한 목사라면 죽기에는 딱 안성맞춤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도무지 죽지 못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목사가 일어서는 데는 사모의 힘이 90% 이상인 것 같다.
남편을 존경해 주고, 격려해 주고, 절대 설교 비판하지 않고, 밥을 굶어도 바가지 긁지 말고, 밤에 잠자리에서 잘해 주고, 초인적인 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으로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그런데 이런 사모가 어디 있나?
나는 왜 이 땅에 없는 장로, 사모만 찾을까?
7. 외형에 대한 애환
초라한 작은 교회 목사라는 의식, 시찰회나 노회에서 당하는 무시와 천대, 부인할 수 없는 열등감,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현실. 개척 교회 목사는 두 갈래의 길을 간다고 한다.(자료 인용)
"극단적인 사견이지만, 목사가 진정 목사다울 때가 있다. (청빙을 받은 분이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개척하신 분은 해당 없다.)
그때는 바로 목사가 개척해서부터 수중에 돈이 떨어질 때까지라고 생각한다.
그 기간이 그래도 가장 정직해지려고 노력할 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많이 꿇을 때라고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부교역자의 설움을 딛고 처음으로 담임목사로서 섬기게 되었으니,
그 뜨거움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단한 감격이요, 영예일 것이다.
그 이후가 문제다. 기복적인 설교나 신비주의적인 설교,
그리고 화려한 예배당 외에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가 목회자들로 하여금 첫 번째 갈등에 빠지게 하고 만다.
십자가를 전하는 곳이지만, 초라한 예배당에 성도는 모이지 않는다.
부인하고 싶은 진실이다. 이러한 목회 풍토에서도 꿋꿋이 견뎌 내시는 훌륭한 목사님들이 간혹 계시지만,
말 그대로 '간혹'이다.
짧은 목회의 경험이지만, 대부분 개척 교회 목사는 두 부류로 나눠진다.
한 부류는 없음의 미학을 채 깨닫기도 전에, 있는 자들의 충견이 되거나 성공을 위한 각종 세미나와 집회를 기웃거리며,
오직 외형적인 성장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왜곡된 성직의 길을 걷는다.
또 한 부류는 짧은 시간에 소위 목회의 성공을 이루어, 배부른 돼지의 길을 걷는다.
넘쳐 나는 헌금으로 권세를 누리려 든다. 돈으로 인맥을 형성하고, 돈으로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간다.
시찰회, 노회에서 설친다. 소위 꾼이 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와 성직자들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그 외침이 사라져 버린 곳이 바로 한국교회다.
외적 성장은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았을지 모르나, 한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전무한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교인 쟁탈전, 세습 문제, 이단 사상의 팽배, 돈벌이에 급급한 신학교, 교단의 정치화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가
목회자들의 소소한 욕심에서 비롯된 배설물들이라고 한다면 지나칠까?
한국교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포장되어야 한다.
어느 한 개인이나 교회, 또는 교단이 브랜드화해선 결코 안 된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큰 교회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교회가 커졌다고 해서 목사까지 커져서는 안 된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빌려, 크고 작은 모든 한국교회의 모든 재정이 쓸 데 없이 넘치기보다,
그저 선교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만을 기도한다."
이러한 풍토와 시대 속에서, 진정 외형적인 초라함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까?
내가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전혀 스스로의 양심이나 남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당당함과 자부심이 과연 가능할까?
8. 사회 현상에서 오는 애환
이제 개척 교회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정말 개척 교회는 안 된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뿌려 놓은 병폐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개척 교회들이 직격탄으로 맞고 있다.
개척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1) 쓸 만한 사람은 이제 절대 개척 교회로 오지 않는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마치 못된 장로들을 목사들이 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진정한 낮아짐, 비움, 섬김, 헌신, 충성, 하늘나라 가치관을 전혀 심어 주지 못했다.
2) 기복주의, 성공지상주의, 과시주의, 외형주의의 부산물인 쓰레기가 고스란히 개척 교회에 던져진다.
그러한 눈으로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개척 교회를 외면한다. 생각해 보라.
영락교회 교인이 좋은가, 판자집 교회 교인이 당당한가? 대형 할인 매장이 있는데, 그 앞에 있는 구멍가게를 단골로 늘 찾아갈 수 있겠는가?
기성 교회 목사들 스스로도 이제는 개척 교회는 정말 안 된다고들 말한다.
개척 교회 목사는 현장에서 해 보고 정말 안 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개척하거나 자립이 안 된 작은 교회를 성장, 부흥시킨 목사님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들은 정말 일반 목사님들이 아니다. 탁월하고 뛰어난 목사님들이다.
3) 대형 교회들이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력이 그대로 개척 교회에는 쇠망치로 정수리를 내리치는 것 같이 치명적인 성장과 부흥의 걸림돌이 된다.
전도가 아예 안 된다. 개척 교회들은 그나마 이 시대의 유일한 전도 방법인 연고자와 전도할 인력도, 무슨 프로그램 사업으로 전도할 돈도 없다.
그나마 가능한 노방 전도, 축호 전도, 전철 전도 등을 해 보면 철저하게 배척받는다.
교회가 그 따위이면서 전도한다고 운운하고 매도당한다.
유일하게 전도가 되는 곳이 있는데, 병원이다. 그러나 병원 전도는 교회 성장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한국교회의 모판이요 뿌리인 개척 교회들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기성 교회 목사들이 외면해 버리고,
그나마 찾아와 주어야 할 성도들이 외면해 버린다.
개척 교회 목사들은 저질인 목사로 그냥 낙인찍힌다.
(사이비와 군소 교단 엉터리 목사들이 대부분 개척 교회 목사라는 사실을 어찌 부인하리!
그중에 엉터리 여자 목사들의 폐해는 그야말로 막심하기 그지없다.)
왜 잘못은 기존 교회, 대형 교회들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개척 교회들이 당해야 하는가?
우리 예장합동 서울북노회 안에도 소위 미자립 상태인 개척형 교회가 1/3이 훨씬 넘는 40여 개에 육박한다.
노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노회는 이들 교회를 위한 아무 대책도 없다.
노회는 이 교회들을 살리는 방안에 가장 우선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회를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가, 교회를 위하여 노회가 존재하는가?
개척 교회 목사들과 기성 교회 목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분명히 대안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진정 노회가 갈 길이 아닌가?
9. 어떠한 사업도 할 수 없는 열악성의 애환
부흥회 하나도 못한다. 무슨 행사 하나도 못한다. 하다못해 목사가 교인들을 섬기고 싶어, 다 모아 봐야 10명, 20명도 안 되는
전 교인들을 모아 놓고 대접할 송년 모임 하나도(20만 원이 없어서) 하지 못한다.
교인 중에 십일조 내는 교인 하나 변변히 없다. 아니 설교 하나 제대로 들어 줄 교인이 없다.
거의 전부가 기초 생활 수급자, 차상위 계층, 정신이상자, 장애자, 노인들이다.
목사는 교회 임대료, 월세, 전기세, 핸드폰비, 전화비, 가스비 하나 제때 못 낸다. 사모 생활비라고? 사치스러운 소리다.
이런 목사가 다 무능하고, 목회를 유기하고, 소명에 문제가 있고, 의당히 고난을 평생 당해야 마땅한 저질 목사인가?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물어보자.
아! 나는 왜 목회의 길에 들어섰을까? 아니 왜 개척을 시작했지? 젊은 날 나도 줄서기 하나 는 잘 할 수 있었다.
작은 교회에 가서 정말 사심 없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리라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이 정말 바보였다. 멍청이였다.
악한 세상을 그렇게 좋게 보았다니,
개척 교회 목사! 그에게 자질과 능력, 목회의 잘잘못, 열심, 소명 여부를 묻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나는 그 사람에게 감히 묻고 싶다.
당신도 1년 굶고, 2년 굶고, 3년 굶으며 목회하고도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으며, 개척 교회 목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10. 목사 직분의 정체성에 대한 애환
목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라리 국수나 라면을 파는 식당을 하지! 채소 장사나 하지!
서울 시내 택시 기사 중 목사가 3,000명이라는 말을 강사가 하는데,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들 "와" 하고 놀랐는데,
나는 통곡을 하고 울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편안하게, 배부르게, 고난 없이 목회 잘 하는 다른 목사들을 원망하다가, 원망이 사회 풍조로 향하다가,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든 선배 목사들을 향하다가, 하나님을 향하다가, 마침내 자기에게로 향한다.
개척 교회 목사 100명 중 몇 사람이나 이 수렁을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갈 수 있을까?
넘쳐 나는 신학생, 자꾸만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의 현실, 고소득 사회를 바라보면, 현재 목사들의 절반은 전업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목사를 바라보면, '저 사람은 목회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게 눈에 잘 보이는데,
자기는 여전히 소명의 길을 끝까지 가야 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데 목회는 죽어라 안 된다. 사람이 자기를 보지 못한다.
"나같이 못난 목사는 스스로 목사 자리 내놓는 것이, 부족한 목사 자리 하나 비워 주고 다른 목사 살리니, 하나님나라와 의를 위한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장로, 집사 자리에 있으면 잘할 사람이 목사 자리에 앉아 목회도 안 되고, 다른 영혼도 괴롭히고, 교회 욕 먹이고,
스스로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다.
개척 교회 목사 스스로 '오직 기도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령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에 속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어떤 일도 10년 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목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 10년 살아도 구제불능인 남편이나 아내는 평생을 살아도 아무 희망 없는 것처럼,
하기야 김삼환 목사는 한 20년 고생을 해야 목회가 뭔지 안다는데,
이런 이야기는 개척 교회출신 목사라야 원색적으로 한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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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어느 사모님의 댓글입니다.
목사님.. 전 가난한 개척교회 8년차 사모입니다.. 개척교회 성도가 한 명이면 어떻습니까?..
윗글처럼 많이 부족한 목사님들이.. 목사가 안 되었으면.. 지금 있는 신앙으로 살았을까요?
그나마 신학을 배우고 목사가 되었으니.. 죄도 덜 지었겠지요...
어쩌면 그 무익해 보이는 부분도 다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가꿔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처럼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한 것처럼.. 적어도 소명을 받았다면..
온 성도들이 다 주님을 떠나고.. 교회에 목사님 가정만 있다고 해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완전한 자들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죄악의 길로 순식간에 빠져들 수 있는 타락한 본성이 있는 인간들입니다..
우리 서로 같은 입장입니다.. 정죄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주님의 섭리하심과 권고하심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우리가 볼 때 근사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 분들 또한 남모를 아픔과 애환이 있을 겁니다.
먹고 사는 것. 알고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않습니까?
무엇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한탄하십니까?
목회자의 쓰러짐을 접할 때는 우리 같이 마음 아파하며.. 가까이는 위로와 권면을.. 멀리는 중보기도 해주면..
가시밭의 백합화(바람불어 찔릴 때 마다 향기가 나니..)처럼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목사님.. 제가 잘나서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직접 목회를 도우면서 지금까지 개척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입장이라서..
누구보다 더 개척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8년간 돌아보면 눈물뿐입니다. 현재도 다달이 날아오는 각종 청구서 때문에 고민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울 목사님이 목회를 접어시겠다고 한다면 나부터 죽이고 떠나라고 할 것입니다.
접는 게 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 이루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목회자 가정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쓰지 않겠습니까?
왜 거기에 이용당해야 할까요? 다른 목회자와 비교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큰 교회는 그들만의 그릇이 있고 작은 교회는 그들만의 분량이 있는 겁니다..
질서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고.. 적재적소에 역량을 주시는 겁니다.
10년이고.. 20년이고 열심히 제 갈 길을 달려간 후에 뒤를 돌아 봅시다..
분명히 나는 한 게 없다. 주님이 다 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물질이 없다고.. 성도가 없다고.. 퇴보하지 마십시오..
물질이 없으면 사모님이 주중에 일을 하십시오.. 사도바울도 천막 일을 한 것 아시지요?.. 저 또한 일을 다닙니다..
성도가 없나요?.. 사모님이 목사님의 첫 성도입니다. 일대일 양육으로 잘 가르치십시오.
사모님이 변화 되면 다른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제가 하는 것을 성도들이 그대로 따라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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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베나본설레임의 댓글입니다.
귀한 글입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입니다. 허나 단순히 애환이라는 테마에는 맞아떨어져서 제목과는 별 충돌이 없지만...
기.승.전.결에 있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즉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어느 개척교회 사모님의 댓글로 한풀이가 매듭지어지는 것은,심히 아쉽단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슨 대안이 있을꼬? 집사나 장로로 있었으면 잘 할 사람이..목사되어..가족에게, 또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 더욱 고뇌하여 고통을 통해 진정한 성도의 한사람으로, 그리고 귀한 목자로 만드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요?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려와서 통증을 느끼지만 결국 죽지않고는 일어나지 못하는 골고다의 진리 외 무슨 말하리요.
내가 죽고 아내가 죽으면 거기 교회가 일어선다는 믿음아래 내 무덤이 골고다언덕되고..
내 고통위에 십자가 서면 거기 주님이 불러주신 상처진 자들과 주님을 위해 헌신된 자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그러나 그 공식도 절대적이지 못하니 진정 하늘의 상급만 기억하면서 참아낼 믿음이 있는가?의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 노회와 시찰의 역할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며
주의 명령인 개척전도가 실핏줄인 작은 교회로부터 주변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속된 조직내 중형이상 대형교회는 상당부분 모판에 링거를 걸어 비료를 주며 양질의 인력과 장비를 투여해서
함께 가는 헌신이 요구되는 싯점입니다. 동감은 되는데 웬지 석연치 않은 아픔..세상은 부조리. 교회는 불완전한 것을..어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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