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25일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크리스마스일것이다.
이 날 오전 9시50분께 서울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다.
대연각호텔은 21층 건물로 당시 서울의 최고급 호텔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1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면서 치솟은 불길은 삽시간에 80여m의 21층까지 번지며 건물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뒤덮었다.
데거나 질식해 죽은 사람들 말고도 불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불은 7시간 반 만에야 꺼졌다.
당시 소방 당국은 미군 소방차의 지원까지 받으며 진화에 나섰지만, 겨울바람이 거세 불길 잡기가 힘들었던 데다 호텔 건물에 스프링클러 따위의소방 시설이 거의 돼 있지 않아 인명 피해를 사뭇 키웠다.
이 참혹한 장면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그대로 전국에 전달되면서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았다.
대연각(大然閣)호텔은 그 이름부터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럴 연(然)’자는 본시 개(犬)의 고기(月-肉)를 불(火)에 태운다는 뜻이었으니 대연각은 ‘크게 불이 날 집’이었던 것이다.
이 참사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화재로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었다.
존 길러민 감독의 유명한 재난 영화 ‘타워링’(1974)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이 대연각호텔 화재라는 말도 있다
당시 주한 대만대사관 리우생룡(余先榮) 공사는 11층 객실에서 10시간을 버틴 끝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는 욕실에서 몸에 물을 적시며 침착하게 구조대를 기다렸다.
15층에 있던 한 일본인은 침대 시트로 끈을 만들어 7층까지 내려와 구조됐다.
전체 사망자 163명 중에는 일본인 10명과 중국인 3명이 포함돼 있어 이 일화는 동양 3국의 국민성을 비유하는 우스갯소리로 회자됐다.
중국인의 침착성과 만만디(慢慢的), 일본인의 영악함을 말해준다는 것.
8층에서 침대 매트에 대충 몸을 의지한 채 뛰어내린 한국 여성은 ‘저돌성’의 표본이었다.
화인(火因)은 프로판가스였다.
1970년대 경제 고도성장에 시동(始動)을 걸던 그때 급속히 보급된 프로판가스가 터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값싸고 편리했으나 위험천만이었다.
‘정치는 없고 경제만 있는’ 당시의 권력처럼 고약했다.
1970년대는 유독 대형 화재사고가 많았다.
황당한 것은 대연각호텔 화재 때 살아남은 한 20대 여성이 3년 뒤 대왕코너 화재 때 숨지고 만 것이다.
1968년 건축공사를 마친 호텔은 준공검사를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불이 났다.
스프링클러도 없었고 옥상에 헬리포트도 없었다.
방재시설로는 화재경보기가 유일했으나 경보음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형 건물에서는 스프링클러 설비를 갖추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당시의 소방작업 현황
서울시 소방업무는 시경 소방과에서 담당하였지만, 치안국 소방과에도 소방업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서울시 소방구역은 대연각호텔이 있는 중부지역을 비롯해 4개구역으로 구분되며, 각 구역마다 본서가 있고 서장이 그 구역을 관장한다.
서울시에는 24개 파출소, 소방대, 그리고 4개 소방서가 있으며, 소방서 밑에는 21개 소방파출소가 있다.
각 소방구역에는 화재경보 접수실과 무선통신실이 있다.
펌프시설은 전시 잉여장비와 1,000갤론들이 물탱크차에 달린 500rpm 日製 펌프로 되어있다.
시에는 소화전 시설이 미비하여, 소화는 주로 소방차의 펌프에 의존하고 있다.
사다리 장비는 31m고가사다리차 한대와 15m고가차 3대뿐 이었다.
다행히 대연각빌딩은 중부소방서에서 0.7mile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방대의 출동이 빨랐다.
중부소방서가 전화로 화재신고를 받은 것은 이날 오전 10시 17분이였다.
불이 건물외부에서도 보일 정도로 확대되자 소방서에는 화재 신고전화가 쇄도했다.
소방대원들이 도착하였을 때에 하부 3개층은 이미 불이 붙어 있었으며, 상층에는 연기가 빽빽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얼마후 21층에서도 불길이 보였다.
우선 소방대원들은 고가사다리로 건물 후방의 7층 옥상에 있던 사람들과 8층 이하층에 있던 인원을 구조하였다.
다음에 고가사다리차와 고가대를 건물 정면에 놓고 하층부 불길을 잡기 위해 11층에 집중주수했다.
물은 약 2,000∼240rpm으로 물탱크에서 공급되었으므로, 그 양이 한정되어 호텔 근처에 있는 소화전을 이용하였다.
불길이 하층부에 휩싸였기 때문에 소방 및 인명구조 작업은 외부에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화재신고가 있은 뒤 1시간도 채 못되어 한국군과 미군의 헬리콥터 8대가 도착하였으며, 한국군 헬리콥터는 옥상 구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헬리콥터가 구명선으로 창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을 구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헬리콥터가 비행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못했으며, 연기로 視界가 불량하고 온도가 상승하여 위험했기 때문이다.
12시 정오에 이르러서는 약 40여 소방장비가 동원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능한 한 모든 경찰력을 동원하여 화재진압을 도울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화재진압에는 소방관 528명, 의용소방대원 113명, 경찰관 750명, 구청직원 400명, 군인 115명, 의료반원 30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협조요청을 받은 미8군 소방대는 펌프, 물탱크장비를 동원 온종일 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길을 막고 서 있는 수천명의 구경꾼들을 통제하는데 200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
11층에 묵고 있던 한 중국외교관을 살리기 위해 극적인 구출작전도 시도 되었다.
그가 묵던 방은 호텔 정면쪽에 있었다.
12시 30분경에 몸을 담요로 둘러싸고 창가에 나타난 그는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을 침착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소방원들은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의 주위에 집중 주수했는데도, 점차 불길은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현장의 모든 구경꾼들의 시선은 이 중국 외교관에게 집중되었다.
TV는 이 광경을 생방송하였으며, TV시청자들로부터는 갖가지 구조묘안이 제시되었다.
한국군측에서는 구명선을 쏘아 올리려 했으나 이는 무모한 시도였다.
얼마후 그는 창에서 보이지 않았는데 분명히 졸도하였을 것으로 믿었다.
오후 8시경 소방원들이 건물 내로 들어가 그를 찾아냈는데, 그때에도 아직 그는 살아있었다.
곧 병원에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1월 6일 호흡장해로 사망하였다.
오후 5시 30분 이후에는 불길이 잡혔으나, 餘熱때문에 7층 이상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저녘 8시부터 18시간에 걸쳐 철저한 희생자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
모든 시체는 屍體公示場으로 운반되었다.
163명의 희생자중 121명은 발굴현장에서 발견되었으며, 38명은 화재시 뛰어내리다가 사망했고, 2명은 헬리콥타로 구조되다가 떨어졌으며, 2명은 병원에서 숨졌다.
희생자중 남자는 96명, 나머지는 여자였다.
국적별로 보면 한국인 147명, 일본인 10명, 중국인 3명, 미국·인도인등이 3명이었다.
시체 신원확인을 위해 사진과 소지품 명세서가 게시되었으나 17구의 신원이 미확인되었다.
[ 출처 ; 동아일보,조선일보,네이버 ,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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