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주일예배<시146:6-10.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2020.07.05.주일예배<시146:6-10.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꿈은 꿈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자의 것이다. 믿음이 행함까지이듯, 꿈은 노력하여 다 이루기까지 내 것이 아니고 그냥 꿈일 뿐이다. 올해 102세 되신 김형석교수는 인생정리를 이렇게 하라고 조언한다. 70까지는 노력하고 칠십에서 팔십까지는 잘 지키고 구십엔 다 내려놔야 한다고,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한다. 노력은 체력에 맞춰 죽기 사흘 전까지 하되, 지키고 누리는 일은 평생 노력과 병행돼야 한다. 그리고 바로 사는 자는 입술에 가슴에 노래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왕 부를 노래라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진실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지난날을 살펴보면 참으로 깜박할 사이였다는 것은 앞으로 오는 시간들도 그렇게 잠시면 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힘든 일 앞에선 “이건 좋은 일의 시작이야. 모두 그랬듯이 잠시면 지나갈 거야.” 복된 일 앞에선 모두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감사의 고백으로 힘을 내는 것입니다. 짧은 육체의 날, 최선을 다해 영원한 세계에 관한 풍성함으로, 남은 날들이 기쁨과 성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의 기쁨과 희망을 맛봅니까? 허망한 모든 것들로부터 그 눈을 영원한 하나님께 돌릴 때 비로소 참된 소망과 기쁨은 시작됩니다.
본문6절입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지금까지 지켜주셨고 또 영원한 세계를 열어주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1. 천지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영원한 진실이십니다.
눈에 드러난 모든 세상만물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은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불변하는 진리,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세상을 열고 생명이 시작되는 선포입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오늘 이후를 열고 가장 복된 시온의 길로 인도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이 창조의 하나님은 진실을 영원히 지키신다고 선언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진리십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진실한 모든 것을 보호하시는 줄 믿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 충성하고 당신을 닮고자 애쓰는 모든 진실한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어느 때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솜씨를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드러낼 때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산천이 아름답고 어린 생명들이 귀여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풍랑이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은 타락한 인간에게 오염된 땅이 인생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걸 하나님의 진노로 보여줍니다. 부조리한 세상가운데 하나님 한분 외에 진실을 찾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을 지켜나가고 계십니다. 즉 진실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영원히 하나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96:13절에서 하나님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고 진실하심으로 백성들을 판단하신다고 했고 시33:4절은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진실을 위해서 진실치 못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진실하려고 포기하는 어떤 것도 주님은 거기 함께하셔서 그보다 더 알찬 것으로 채우시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7-9절을 함께 읽기 원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이제껏 지켜주셨고 또 새 일을 계획하시고 열어주시는 우리 주님은,
2. 온갖 설음과 아픔가운데 계신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십니다.
1) 공의로우신 하나님.
본문에서 “억눌린 자를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곳곳에 억울하게 눌린 자, 힘이 없어 뭔가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들이 토해낸 신음과 호소가 넘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공평과 정의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영원히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십니다. 혹 여기서 안 풀리는 의혹과 부조리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골고다 언덕 십자가아래 그 답이 있습니다. 영생을 믿고 거기 소망을 둔 자는 이 세상의 모순이 그렇게까지 억울하지 않습니다. 비록 아파도 우리들의 결론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주린 자를 먹이시는 하나님.
시14:9절입니다.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새끼들까지도 먹이시는 하나님은 자애롭고 인자하심에 끝이 없습니다. 짐승과 우는 까마귀새끼는 신분귀천과 선악에 무관하게 천지분별 못하는 철부지인생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물며 택한 당신의 자녀들이 주려 있다면 풍족하게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먹이시는 것이 어찌 떡과 물뿐이겠습니까? 예배자로 한평생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3)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하나님.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못 보면 좋은 것, 좋은 기회, 좋은 사람, 다 놓치고 맙니다. 안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보게 하셔서 천국을 알게 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다른 이의 아픈 마음과 그 사정을 보게 하시고 답답한 현실 한가운데서도 장차 일어날 놀랍고 귀한 생명의 일들을 보게 하시는 주님께 저와 여러분, 보이는 모든 것 곧 몸과 생명과 시간과 정성과 자손과 물질을 다 드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4)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겸손은 자칫 비굴함으로 나타나니 경계해야 합니다. 겸손과 비굴의 구별은 무엇이 기준입니까? 힘입니다. 겸손은 공손하고 친절하되, 있는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편안하게 제압합니다. 반면, 비굴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친절해 당당하지 못한 을이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하려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할 힘과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악을 이기는 선한 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으로 넘친다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고개를 숙여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이 친절하면 억지겸손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 가운데 비굴한 자를 일으켜서 복음으로 힘 있고 권세 있는 겸손이 넘치게 하십니다. 큰 재산이 있어도 작은 차타고 사치하지 않고 반듯한 자세로 검소하게 살면서 힘든 사람을 소리 없이 돕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한편, 능력 없어 어쩔 수 없이 힘든 삶을 잠시 살아도 간절히 주님을 바란다면 그에게 히브리인의 왕, 언약의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오늘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5)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십니다.
어질고 인자하신 하나님, 절규하는 자의 하나님, 연약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추수 때 모퉁이까지 베지 말고 이삭을 흘려서 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울하게 하거나 괴롭히면 친히 직접 보복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남편이 있어도 과부처럼 외롭고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과부 아닌 과부나 부모가 있어도 바른 교훈을 못 받고 팽개쳐둔 고아 같은 청춘들 많습니다. 집이 있고 고향이 있고 친척이 있어도 마땅히 마음 둘 곳 없고 갈 곳도 없어서 늘 낯선 곳을 기웃거리는 나그네인생, 하숙생들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현대인의 고독과 결핍은 텅 빈 항아리에 아우성과 절규를 가득채운 채 정처 없이 떠다닙니다. 저와 여러분, 주안에서 받을 복을 다 받은 우리가 이제는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도 얼마 전까지 나그네였고 고아였고 과부였다는 사실을 전해야합니다.
6) 의인들을 붙들어주시고 악인들의 길은 꺾어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본문의 의인은 의로운 하나님을 믿어 의인이라는 이름을 받은 교회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뜻을 정하고 머리를 숙인 자들,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그들이 의인입니다. 본문대로 의인은 하나님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나 악인, 곧 하나님을 등지거나 무관심하면 하나님이 그 가는 길을 구부러뜨려 헝클어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멋져 보이고 근사해도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생명이란 영원성이 보장돼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생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장하시기 때문에 비로소 참된 행복에 참된 생명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10절입니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교회와 가정을 지켜주셨고 또 항상 열어주시는 약속의 우리 주님은,
3. 영원한 우리의 통치자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히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신다는 것보다 더 큰 안전과 보장과 기쁨은 세상에 없습니다. 끝이 없는 주님의 다스리심과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 통치하신다니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민족마다 나라마다 그리고 직장이나 단체마다 모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바른 지도자일 것입니다. 바른 지도자가 나타나면 거기엔 공평과 정의와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셉처럼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결코 영원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통치자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한 통치자요, 평강의 왕이며 가난한 자의 친구요, 억울한 자의 재판장이십니다. 우리 몸은 끝이 있어 내 곁을 떠나도 주님은 영원한 하늘나라,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물쭈물하다보면 또 금방 겨울입니다. 반년 지납니다. 연초 자정예배에서 결단한 일을 오늘 말씀으로 다시 다짐하는 날이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