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2020.06.28.주일설교<마25:1~13. 다 졸며 자는데 밤중에 소리가>

설렘심목 2020. 7. 6. 06:51

2020.06.28.주일설교<25:1~13. 다 졸며 자는데 밤중에 소리가>

[2020.06.24.수요. 인생무상과 허망함과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진리가 없을 때 나타나는 절규이다. 육체가 순간이듯 감동이 순간이며 아름다움도 순간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허망은 아니다. 잠시 보여주는 진선미는 결코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참 의미의 그것들을 영원한 곳으로 소개하는 마중물처럼 가장 확실한 영원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조물주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생명의 영원한 소망이며 기쁨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눈이 열리기까지 삶은 참으로 고단한 길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계시의존적인 분야라서 먼저 절대한 신뢰 없이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열리는 놀라운 나라, 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면 육체의 허망함은 허망이 아니라 허망을 통해 더욱 절실해진 그분의 영원한 나라가 내 본향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선보이는 복의 시그널이다.]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엄위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성경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해 분명하게 끊임없이 예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영혼이 졸거나 잠들어 있어 허망한 것에 쫓겨 허덕이는 인생길을 갑니다. 한절씩 살필 때 우리 영혼이 힘을 얻어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여기서 그때 천국은 본문 전 24장을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신약에서 종말에 관해 매우 자세하게 다루고 있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인생교과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시에 반드시 닥칠 마지막에 잘 준비되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당시 유대지방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밤중에 신부 집에 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때 신부될 처녀가 등불을 켜 맞으러 나갑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손에 등불을 들고 주님을 환영하러 나가는 이 장면은 이삭이 아내가 될 처녀 리브가와 함께 귀가할 낙타행렬을 해질녘에 날마다 들판에 나가 한 방향을 주시하며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연모함과 설렘 그것은 간절함과 목마름이란 말이 적절할 것입니다. 주께서 구름타고 공중에서 오실 때 우리도 성경에 이른 대로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사실을 기억합니까? 간절함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날은 모두 가냘프고 수줍은 신부처럼 두려움과 설렘과 놀라움에 가슴이 뛸 것입니다.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세상도 불신자와 신자로 구분되지만 믿어 구원받은 신자도 슬기로운 성도와 미련한 성도로 나눠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살 때에 제아무리 똑똑하고 실수가 없이 탁월해도 영적으로 미련하면 모래 위의 궁전입니다.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미련하다는 말은 깨달음이 일정수준에 못 미침을 말합니다. 밝히 깨닫게 되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짐승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추악한 세상의 주인은 악한 마귀입니다. 마귀는 육체에 잡혀 사는 사람들을 속이고 꾀어 함정에 빠지게 해서 그들을 노예삼고 등에 얹혀 삽니다.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거기가 모두라고 생각하게 하고 결국 짐승의 밥이 되어 육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불신앙의 평생 삶입니다.

믿음이 있고 구원 받은 이들도 기름이 준비되지 않으면 불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름이란, 등을 밝히는 연료인데 등은 갖고 있는데 기름 없이 갖고 있는 성도들이 간혹 있습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는 열이요,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쓰레기들을 태울 만한 열정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음침한 것, 어둠을 좋아하는 육성을 밝혀 스스로 나무랄 수 있는 환한 진리의 빛은 사모하는 이에게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끝없는 은총입니다.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슬기 : 사물의 이치를 밝혀 일을 처리하는 능력. / 미련 :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고 둔함.> 본 절은 준비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방학숙제를 정성껏 잘한 아이들은 개학이 기다려집니다. 곤충채집을 해서 투명포장에 아주 예쁘게 한 아이는 숙제검사와 과제물제출에 마음이 설렙니다. 반드시 속히 오는 그날 주님 만날 준비가 된 이들은 크고 놀랍다는 그날이 결코 두려운 날이 아니라 설렘으로 주를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간 고생한 것 알아주시고 칭찬하고 보상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5~6: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주님 생전에도 그날이 가깝다고 했고 지금도 천국이 가깝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익숙해 이젠 무감각합니다. 말세라는 단어가 더 이상 경고성 예고가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가깝다는 것과 속히 온다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크로노스에 해당하는 시간표의 시점이 아니라 카이로스에 해당하는 시류와 시대, 곧 흘러가는 세월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종말이 신속하게 이를 것을 마음에 항상 두고 늘 준비된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날과 시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종말은 마치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본분은 그렇게 졸며 자고 있는 영혼들을 지적합니다. 보세요. 세상은 잠자고 있고 교회는 졸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깨우는 파수꾼이어야 하는데 파수꾼이 졸고 있어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어지럽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신을 깨우는 자를 미워합니다. 졸거나 잠든 다섯 처녀의 모습입니다.

 

6~7: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소리가 언제 납니까? 세상살이 바빠 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감격이 둔해지고 차츰 세상 사람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려는 그 때, 이 정도는 주님도 이해하실 거야라며 성경과 무관하게 자신의 잣대로 삶을 주관할 때쯤, 갑자기 우렁찬 소리가 졸고 있는 영혼을 깨웁니다. 깨어보니 링거주사줄이 여기저기 꽂힌 채 병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 죽이진 않으셨네. 주여, 감사합니다.” 법원에서 소환영장이 오기도 하고 슬픈 소식이 오기도 합니다.

 

보라, 신랑이 온다.” 소리치기 전에 이미 깨어 기다리고 있어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가슴이 뛰는 저와 여러분이길 축원합니다.

 

8~11: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믿음의 바닥이 드러나 진리의 불빛이 간당간당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닥친 그날 준비되지 않은 자신을 보며 발을 구를 때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합니다. 인류의 최초구원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부부의 앞을 가죽옷으로 가려준 일이고 다음으로는 그 죄의 유전으로 세상이 다 오염됐을 때 대홍수 가운데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방주로 구원하신 일입니다. 성경은 방주 문을 하나님이 닫으셨다고 했고 계3:7절에서는 열면 닫을 이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문의 열쇠를 주님이 쥐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12~13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 두 구절은 세 가지 엄숙한 사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졸며 잠든 영혼이 놀라 깨어난 후 아무리 힘을 써도 구원받을 길이 없는데 주님도 너를 모른다고 잘라 말씀한다는 두려운 사실입니다. 다음엔 처방이 나옵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문을 닫고 널 모른다하기 전에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 이유, 즉 깨어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는 그 날과 때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하시는 구원과 회복의 힘입니다. 주로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으로 엎드리게 하셔서 구하십니다. 그리고 위로하시고 한없는 평강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 세상과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간추려봅니다.

온 인류를 두 무리로 구별해 봅니다. 반은 졸기도 하고 잠들어 있습니다. 잠든 것은 세상이고 조는 것은 교회들입니다. 졸거나 잠 들거나 문이 닫히면 밖에서 가슴을 치며 울기는 한가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한번 닫히면 모든 기회의 문도 닫힌 것이니 이 후로는 어떤 구원도 없습니다. 다만 자비로우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심장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러드린 게 기억납니다.

숙제를 정성껏 한 아이처럼 늘 준비된 성도로 살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늘 성실하게 살아서 언제 그날이 도적처럼 닥쳐와도 놀라지 않고 부푼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그날을 준비하라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준비된 자,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준비,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에 순종할 자세로 무장돼야 합니다. 순종, 백번 강조해도 부족한 기독인의 덕목입니다. 순종과 온유, 그리고 거룩함을 향한 몸부림.

내 일상의 삶이 과연 성경에 부합한가? 역행하는 부분은 없는가? 예리하게 살피며 칭찬받는 우리모두이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