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3. 주일설교 <출3:18. 인생길, 나그네길, 예배하러 가는 길.>
2019.02.03. 주일설교 <출3:18. 인생길, 나그네길, 예배하러 가는 길.>
[2019.02.02. 생각이 자기와의 대화 곧 속으로 하는 혼잣말이라면 이제 생각처럼 기도하고 기도처럼 생각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도 하나님이 없었던 적은 없었고 성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 없이는 어떤 일도 허상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화의 대상이 사람인 경우와 하나님인 경우에 차원이 다른 세계를 열어갈 것이다. 시공무관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해드린다면 그의 생각은 기도처럼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간혹 아빠 손을 놓고 혼자 훌훌 뛰어다니고 싶고 그럴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피조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이 불행의 시작인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인생 백년,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세월입니다. 이 100년 안팎의 세월 안에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른 걸 말하겠지만 명답은 언제나 하나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은 존엄성과 영원성입니다. 살았으나 잠시 후 사라지거나 주변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면 참으로 허망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보이는 모든 생명이 영원하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어떤 것이든지 반드시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삭아 없어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은 그 끝이 다 허무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전도서는 시작합니다. 그 헛된 생명이 가장 존귀하게 빛날 수 있는 조건 하나는 죽지 않고 영원하게 존재할 때입니다. 세상에선 죄로 인해 결코 볼 수 없고 불가능한 이 문제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체로 오심으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은 예수그리스도를 찾아 그 안에서 모든 결론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납니까? 그렇습니다. 약속의 말씀 그 안에서 만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길, 제사길, 나그네 길에 진리요, 생명이신 복음, 복된 소식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급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였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 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 하소서 하라.”
본문이 말하는 성도의 삶, 그 길은..
1.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동행의 길입니다.
본문은 “히브리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였은즉”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배라는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임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일4: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의 손, 하늘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자신을 위하여 시작하신 일이고 그것은 사랑으로 시작돼 사랑으로 열매 맺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데 그 신앙고백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구원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마음으로 믿어드리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원의 여정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비로소 가능하며 그것은 예배로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에는 예배를 향한 길이 하나님의 신이 히브리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엔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바로에게 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외로운 길이지만 외롭지 않게 가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변에 믿음의 귀한 친구들이 풍성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이 함께하는 길, 외롭지 않은 길, 예배를 향한 길, 두 번째는
2. 사흘 길 광야를 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 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 하소서하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안에 인생의 바른 목적과 형통으로 가는 정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사흘쯤 가야하는 길은 편한 길이 아니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광야길입니다. 물과 풀을 찾기 어렵고 곡식을 심어 추수하는 푸른 초장이 없고 모래바람과 뙈약 볕과 차가운 밤입니다. 인생은 예배하러 가는 길인데 광야길입니다. 광야 길은 누구나 피하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선하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음이 열리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광야 길은,
첫째,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시온의 복된 길입니다. 광야 길은 사방을 둘러보아 의지할만한 곳이 안 뵈는 허허벌판입니다. 신8:3-4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40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아직도 노예근성에 젖어 먹을 것 입을 것 넉넉히 주면 우상숭배도 마다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풍요의 땅에서 허허벌판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훈련제목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 8:3절을 몸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에게 전해 경건한 제사장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택한 백성에게 혹독한 광야 길에서 예배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입니까? 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한가운데 지금 이렇게 예배자로 부르신 것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평탄한 길보다 광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사방에 대적들과 짐승들과 해충으로 에워싸이고 풀하나 없는 사막길이라면 마침내 누구라 할 것 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백성들이 자신을 간절히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도와주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에 노예 된 사슬을 풀어주어 소유삼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높임을 받고 것입니다.
광야 길의 목적 두 번째는 경건의 길로 인도하여 복된 삶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제사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만복의 시작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애급에서 고기구어 부추랑 마늘이랑 기름지게 먹던 시절을 그리워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그보다 더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 길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과정은 비록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바른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단순히 물질의 풍요만을 기원하는 이방종교에 오염됐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진정한 부요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40년의 험악한 광야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상29:12입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잠22:4절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 잘 먹고 잘 살려면 먼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사는 것은 결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들에게도 돌아보기도 싫은 광야길이 있었고 그것은 예배회복으로 인한 만복의 시작이었음을 이제 주님 앞에 세상 앞에 감사의 증거로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이 광야길이 사흘정도 걸린다는 것입니다.
광야길 세 번째는 사흘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사흘이면 100km정도를 갑니다. 지금 본문은 그러한 수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흘이란 애급의 풍토와 세속을 떠나 하나님을 만날만한 충분한 시간이며 이는 삶으로 올리는 산제사, 곧 거룩함과 경건을 위해 받아야 할 모진 훈련기간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민족마다 이 사흘이란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모두 다릅니다. 지혜롭고 겸손하며 자신에게 단호한 자는 그 기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이지만 어리석고 교만하고 게으르면 사흘 길은 3년이 될 수 있고 3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택함받아 복된 사흘 길 광야의 세월을 누구든 거치게 되지만 그 기간과 모습이 달라서 오늘 본문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것을 일러 성도의 삶을 기름지고 평화롭게 할 줄 압니다. 그렇다면 사흘 길 광야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아래 평강의 숲이 되게 할 순 없을까?
스3:12-13절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림으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사흘 길 광야의 세월을 은혜가운데 보내는 방법은,
3. 포로귀환 직후의 겸손과 감동을 유지하며 가는 사흘 길이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초토화된 고향땅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일러드렸습니다. 즉 깨진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는 욥의 심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징계의 포탄이 가정과 민족을 불살라 온통 잿더미가 된 고향집을 바라보는 자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개탄스럽고 처참할 것입니다. 가족 잃고 재산과 명예와 건강조차 무너져 참담한 자신의 인생을 보며 절망하는 패배자, 다시는 하나님 앞에 죄짓지 말아 이런 꼴이 되지 말아야하는데, 새로운 결단조차 무기력 가운데 엄두도 못 내던 자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아 모든 것을 되돌려 받은 그 감격 앞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닥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 것이 방금 읽은 에스라서입니다. 민족적인 불순종과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하는 노년층은 고레스왕의 선처로 쫓겨났던 고향에 돌아와 성전재건의 첫 삽을 뜨자 너무나 감격하여 대성통곡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선 허리를 일단 숙이는 게 기본입니다. 낮게 숙인 자는 공격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인자무적이란 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이 사납지 않으며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것인데 낮아진 자에게는 많은 시련과 시험이 훨씬 부드럽게 지나갑니다. 바로 어제 포로에서 풀려나 오늘 고향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을 오래 유지할수록 겸손은 온갖 능력과 화목의 기초가 될 것이며 밀려오는 많은 파도를 가볍게 통과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지지 않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일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낮추셔서 초심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낮추시면 그것은 힘들어도 겸손의 시작이지만 세상이 나를 낮출 땐 비참한 마음으로 즉시 주님께 달려와 피해야 합니다. 버거운 죄 짐을 주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값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심판대신 영생천국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놀라운 감격은 너무나 커서 실감이 덜 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밤낮없이 크고 작은 구원을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건강한 내 육체로 걸어오기까지 숱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님은 신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우린 가쁨으로 구원의 감동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까맣게 잊고 작은 고개턱에서 숨이 차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마음이 느른해져서 마음속에 불평과 교만이 올라오면서 초심이 무너집니다. 초심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포로에서 방금 풀려난 게 엊그제인데 벌써 까맣게 잊고 작은 일에 불평하는 것이 보통의 인생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런 아류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들입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초심을 붙잡을 때 말씀만이 내안의 능력인 줄 알고 날마다 주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성실로 자신을 낮춰 초심을 유지함으로 포로에서 금방 돌아온 사람들처럼 그 구원의 감격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함성이 그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