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2019.01.27.주일설교 <행5:33-42 가말리엘과 제자들>

설렘심목 2019. 1. 27. 18:26

2019.01.27.주일설교 <5:33-42 가말리엘과 제자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 없이도 너무 자신만만하다는 것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서도 불안하다는 것.]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충만하여 예수를 증거하니까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불편하다 못해 크게 노하여 어찌하든 사도들을 해치려고 합니다. 이때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 교법사 가말리엘이 나타나서 지혜로운 말로 모두를 잠잠하게 합니다. 일곱 명의 교법사에게만 주어지는 라반이란 칭호 중 최고의 수석이 된 그는 한때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직까지 맡았었고 바울을 가르친 매우 인격적인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은 흥분한 저들을 가라앉히고 베드로일행을 탁월한 지혜로 보호합니다. 내용인즉 지금 그 일이 사람에게서 시작된 일이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니 너희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요. 혹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이라면 오히려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지금은 조용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충고입니까? 이런 가말리엘같은 사람이 우리 곁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하늘로부터 지혜를 내려주셔서 모두 가말리엘교법사 같은 지혜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본문 34절 앞부분입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3가지를 추려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깊은 인격과 지혜를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가말리엘교법사의 지혜는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했습니다.

가말리엘은 많은 이들에게 평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혼란상황을 일언지하에 평정하는 위력을 보입니다. 그 의견은 모든 이에게 호응을 얻어 그대로 흥분한 군중의 결론이 됐습니다. 여러분의 조언이 중요한 어느 장소에서 명쾌하게 설명되고 모두가 기뻐하며 받아들여 귀한 결론이 되는 능력과 권세가 되길 축복합니다. 세상을 보면 예수, 곧 복음 외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악한 세상에 가말리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선악과에서 떠나질 못하는 인간내면의 죄성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주께서 가말리엘의 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가말리엘의 진정한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39절에 드러난 하나님경외사상입니다. “이 일이 행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라면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분명 가말리엘교법사는 바리새인입니다. 잠시 참고삼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관해 살펴봅니다. 사두개인은 다윗과 솔로몬 왕 시절 제사장인 사독의 후손들을 말하는데 줄곧 정치세력과 밀착되어 다분히 정치적 종교인들이었으며 부활과 천사와 예정론이나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 삶에 치중하고 정치권력화해 유대교제사장직을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인정했지만 한편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중히 여겼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를 동시에 주장했는데 이들은 예정론과 메시야대망과 부활사상을 소유했지만 지나친 형식에 매달렸습니다. 그래도 율법준수에 최선을 다해 당시 존경받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듣는 무리들은 주로 이 바리새인들인데 그 이유는 주님근처에서 늘 접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사두개파는 문제가 심각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비록 율법을 중시하여 형식에 치우쳤으나 세속과 결탁하여 인본주의 사상에 오염된 것은 사두개파였지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유대교는 바리새인들의 후손이고 사두개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멸망 때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형식을 너무 중시해 주님께 책망을 자주 들었지만 그들은 살려두셨고 교리자체가 무너지고 세속화한 사두개파는 없애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가말리엘은 지금도 유대인가운데 최고의 랍비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우리가 봐선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의 너그러운 인격과 지혜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39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사람이 한 일이면 과거의 드다처럼 스스로 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일이면 너희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니 그 사람들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혜롭고 훌륭한 권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특별히 영적인 문제들 앞에서 우왕좌왕할 때가 많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일들은 알고 보면 영적인 배경을 근거로 시작된 일입니다. 모두가 몰려간다고 그게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길은 소수가 가는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힘들 때마다 기도로 막힌 담을 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간다고 기도한번 하지 않고 덩달아 따라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두 번째, 사도들은 예수이름으로 인해 받는 능욕을 기뻐했습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2-23) 말씀의 능력이 저들을 기쁨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하면 그것을 말씀 안에 거한다고 표현합니다.

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신 주님을 사도들은 믿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권세와 힘과 기쁨은 믿음입니다.

 

1968년 영국 모 대학 고고학과 졸업생들이 졸업여행으로 사하라사막 횡단을 결정하고 출발했습니다. 두 팀으로 나눠갔는데 도중 기상악화로 조난을 당해 3주 가까이 헤맵니다. 구조대가 먼저 발견한 팀은 모두 죽어있었고 며칠 뒤 발견한 팀은 다 살아있었습니다. 생존팀은 통신장비가 있었습니다. 변을 당한 팀에는 배터리관리가 잘못돼 처음부터 통신이 말썽을 부리다 중요한 때 먹통이 됐습니다. 곧 구조대와 만난다는 희망과 소통이 끊긴 팀은 소망과 절망이 결국 생명과 사망의 선을 긋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힘들어도 우리가 변함없이 찬양할 수 있는 이유, 주님과 소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주님의 놀라운 품에 안긴다는 것, 최고최상의 희망입니다.

전도의 상급과 함께 하늘에 쌓여지는 여러분의 영광과 기쁨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할렐루야.

42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세 번째, 위기를 넘긴 사도들은 쉬지 않고 전도에 더욱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험한 위기를 넘기면서 점진적으로 깊어지며 생명력을 높여가게 됩니다. 폭풍한설을 맞고 겨울을 난 과목이 맛도 있고 색깔도 좋고 향도 좋듯이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한 아이는 커서 건강합니다. 우리의 신앙, 거친 일을 겪을 때 도리어 기뻐하시기 축원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저들은 어디에 있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늘 생명의 위협이 있었지만 능력있는 전도자의 하루하루는 매우 행복했던 것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일을 맡아 그것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은 자신의 중요도를 높여줍니다. 예수전도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해 종종 스스로 전도를 가로막는 일로 실망해도 여전히 전도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생명의 사건입니다. 세상에 중요한 일을 두고 살펴보아도 직접 영혼과 생명에 관계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할 이 전도는 영원에까지 이르는 생명이기에 놀랍도록 중차대한 일입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환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선생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수술을 잘 부탁합니다. . 그래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버스기사입니다. 선생님의 손에 한 사람의 생명이 맡겨지지만 내손엔 항상 수십 명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믿고 차에 오릅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피며 다루게 됩니다. 버스기사보다, 의사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고맙지만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만큼 중요하지는 못합니다. 밥 먹고 숨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길을 모르고 달리는 인생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우리들은 매우 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가말리엘처럼 훌륭한 덕을 지니고 지혜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가말리엘보다 더 탁월한 삶은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로 인하여 핍박받는 일을 마땅히 여기며 기뻐하는 능력있는 전도자의 삶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는 삶은 언제나 힘과 기쁨이 넘칩니다. 가말리엘교법사의 인격과 두들겨 맞는 제자들 중 누가 더 부럽습니까? 세상은 분명 넉넉한 살림살이에 존경받는 가말리엘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 비록 볼품없는 모양으로 인생 만신창이가 돼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도 복음을 생명처럼 여기고 주 예수그리스도께 붙잡힌 제자들의 길을 우리는 무조건 따르는 자들입니다. 무조건입니다. 조건을 붙이면 계산이고 조건이 없으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받은 구원 앞에 무슨 입을 열겠습니까? 오래전 제 간증입니다. 여니 때처럼 새벽달을 바라보며 찬 날씨에 웅크리며 승합차 키를 들고 사택을 나서는데 제 마음에 거듭거듭 영의 음성이 들립니다. 세 번입니다. “뉘 앞이라고 감히 입을, 뉘 앞이라고 감히 입을, 뉘 앞이라고 감히 입을주 앞에 감사와 찬송과 자랑과 선전과 감동과 아멘 외에 무슨 입을 열꼬? 저는 놀라 아멘을 연신 올렸습니다. 날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 감히,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 택해주셨고 이젠 주님위해 주님 외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우리 모두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나이다. 여기 우리에게 가말리엘의 지혜와 인품도 주실 줄 압니다. 시간은 걸려도 그 일은 분명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깊고도 깊은 영의 비밀과 기쁨을 알아 더욱 겸손하고도 담대한 믿음의 길을 열어 오늘 이후 새롭게 하옵소서. 외로운 우리교회, 제자들의 믿음위에 가말리엘의 지혜를 더하여 주의 기쁨을 더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