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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주일예배설교<롬8:31-39.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막으랴.>

설렘심목 2017. 4. 10. 08:59

2017.04.09.주일예배설교<8:31-39.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막으랴.>


[19458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그 20일전 19457165시 반 2차대전 중 맨하탄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뉴멕시코사막 엘러모고도에서 태양열의 1000배 되는 원폭실험이 성공을 거둔 미국, 이어 미의회에서 아인슈타인박사는 원폭에 대한 설명을 했고 의회원들은 너무 두려워 장차 원폭을 막을 새로운 무기는 가능한가를 물었다. 아인슈타인박사는 이것을 막는 무기는 사랑과 평화 외엔 없다.” “만일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후 4차대전은 막대기와 돌로 싸울 것이 분명하다.]


바울시대 로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족과 함께 생명을 건 모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믿음이라면 몰라도 믿음의 절개를 지키려는 숱한 성도들과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로마관리의 감시아래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 결국 잔혹한 방법으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1세기말에 훌륭한 설교자,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삼촌인 플라비오 클레멘스는 죄수, 노동자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결국 조카인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아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목에 닻을 걸어 던져졌습니다. 그는 많은 영혼을 구하고 한 알의 밀알이 돼 주 앞에 달려갈 길 달려갔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음 앞에 찬송 부르며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사자 앞에, 뱀 떼 자루에 알몸으로 바다 속에, 산채로 불 위에서, 톱에 썰림으로,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림으로 그렇게 그들은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러한 두렵고 불안한 고난의 시대에 믿음이 흔들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꾸준히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 지속적인 동행의 삶과 3층천의 믿음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본 천국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리스도의 노예요, 사환이요, 종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의 온 생애를 불살라 드릴만큼 벅찬 최고의 가치와 사명을 오로지 복음전파에 걸고 결혼도 포기한 채 살아간 사람입니다.


시대가 험할수록 그리고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느낄수록 바울사도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어떠한 환경에도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본문 31-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1. 아들까지 내주신 아낌없는 지고지순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죄인들을 품으셨는데 감히 누가 방해하고 저항할 것인가? 하물며 그 사랑은 특별하여 아끼는 아들을 내주신 놀라운 사랑인데 아들까지 주신 분이 뭘 더 아끼시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비록 죄인과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4:15)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가운데 사랑이란 단어처럼 많이 쓰이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매우 다양한 곳에서 폭넓게 쓰입니다. 본문에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에선 찾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모든 사랑의 원조인 이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담보로 하고 죽음을 통과한 최고의 사랑,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버이의 본능 속에 심겨져 있어서 다소 설명이 가능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것은 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바로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타락한 인생들을 끝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결국 자신의 생명으로 그 타락한 인간들의 죄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해결받은 자는 하나님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니 하나님을 노래하고 기뻐하며 나의 생명되신 주님이시라고 소리 높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이란 어디서 빛이 납니까? 그렇습니다. 베풀 때, 공급할 때, 채워줄 때에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여타의 모든 사랑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아낄 아무 것도 없는 이른 바,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다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의 사랑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31-32절은 이러한 극진하신 사랑이 우릴 향해 날마다 공급되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괴롭히냐는 것입니다. 33-34절을 함께 읽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이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시니라.”

 

2. 주께서 의롭다 하셨으니 우리를 정죄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죄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다고 선포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합니까? 10: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인간을 영원히 처벌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한다면 그는 필경 하나님의 대적자요, 마귀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고발할 어떠한 이유도 이미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청산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인생이 고달플까요?

 

성도여러분. 사랑도 여러 가지듯이 죄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게 나눠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혈로 해결받은 것은 원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범죄하여 온 인류에게 유전되고 있는 이 원죄는 인간자력으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내면의 본성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는 어딜 찾아봐도 답이 없습니다. 고행을 하면서 초월적 신비현상에 의존해도 여전히 그것이 인간의 죄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인간자체가 죄를 바탕으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이 딜레마에 우리 하나님이 친히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죄에 눌려 죽은 영혼들은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듯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를 인정하고 믿어드리면 됩니다. 주를 믿으니 죄에서 풀려나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겁니다. 이후로 우리를 아무도 고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의로 알고 짓는 고범죄의 문제는 평생 주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우리를 평생기도자로 세워가고 있지만 정죄자는 없습니다. 즉 정죄할 자 없으나 기도할 이유는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38-39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확신하여 이르기를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일, 장래일, 능력, 높음,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37절에서는 성도에게 당한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을 거론하면서 이 모든 일들을 넉넉히 이길 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악한 환경을 넉넉히 이긴다는 확신을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이 생명을 드리고 배운 교훈을 지금 우리는 앉아서 받습니다. 편하게 듣는다고 진리가 훼손당하진 않습니다. 이 말씀에 집중해서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이길 믿음을 쟁취하기 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소원이기 전에 하나님의 소원인줄 믿으시면 큰 소리로 아멘입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환경을 이기는 능력으로 확인돼야 합니까? 짧지 않은 기독교사에서 믿음으로 환경을 이기는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답은 밝혀졌으나 답을 따라 환경을 이기는 성도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생명을 그대로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영생주시기로 결정된 우리에게 세 번에 거쳐 생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우리의 형질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한 존재로 결정하신 것이요, 두 번째는 육신을 입혀서 이 땅에 보내실 때 주신 생명이요, 세 번째는 예수를 믿게 하신 후에 거듭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렇듯 생명을 주신 사랑 중에 특별히 우리가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과 이유는 세 번째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해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되자 그 죄를 벗겨주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어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 그리고 어둠권세가 마지막으로 내미는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3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주를 믿으면서 당할 수 있는 육신의 모든 위협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즉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은 죽음을 향한 패자의 행진입니다.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는 과정입니다. 다른 말로 전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 혹은 어떤 이유로든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나아가서 죽음 뒤에 더 나은 뭔가를 보장받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고통들, 즉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이 전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들이지 죽음을 전제하지 않은 그러한 단순고통으로는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제대병장의 마지막 유격훈련이나 좋은 직장에 취업한 사람의 연수원훈련,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하는 고생 등은 견딜만한 것들입니다. 이렇듯 죽음과 고통은 그것을 앞에 둔 마음자세에 따라 사람들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바울이 나열한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 사망과 생명, 천사나 권세자, 현재일과 장래일,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러므로 죽음 뒤에 시작될 천국의 삶으로 인해 성도의 신앙생활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거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만 바로 믿고 깨닫고 풍성하게 누린다면 우린 믿음의 분량만큼, 주님과의 친교의 분량만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은 3층천을 다녀온 깊은 믿음입니다. 3층천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곳입니다. 가슴이 설레는 곳입니다. 내가 봤고 내가 구축한 하늘나라 1층천, 다른 사람들이 봤고 나름대로 그려낸 2층천, 너도 나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열어주신 하늘문, 그 안 3층천, 3층천만 생각하면 갑자기 하나님의 진선미가 안개비처럼 온몸에 녹아드는 그런 묘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늘의 신령한 영혼의 황홀함에, 가끔은 젖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죽음과도 같은 성도의 고난을 무엇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증거합니다. 오늘 설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어떤 능력으로 성도에게 임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을 뛰어넘어 영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깨닫게 된다면 그 깨달음을 통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 당하는 고난의 실체는 장차 받을 큰 영광과 기쁨은 비교조차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지금 우리 안에서 눈을 뜨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믿음이 졸고 있으면 하나님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지 못해서 세상의 파도 앞에 맥을 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대로 만나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영원한 것이며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곳인지를 아는 확실한 믿음만 생긴다면, 그 믿음만 있다면 우리도 바울사도처럼 예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소리치면서 악한 환경을 밟고 나무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곧 우리의 모든 능력이 됩니다. 믿음 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살아계셔서 우리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되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좋으신 아버지하나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다 알지 못하여 세상 앞에 움츠리며 환난가운데 떨며, 죽음을 두려워하여 옹색한 믿음으로 무능하게 간신히 견디어 온 인생들이 머리를 조아려 다만 주의 은총을 바라나이다. 주여. 이제 말씀을 먹었사오니 주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힘차고 늠름한 주의 군사되기 원합니다. 믿음을 주옵소서. 그 크신 사랑으로 세상과 환경에 눌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하옵소서. 승리는 오직 주께 있나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